선입견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

(Edmund Husserl,1859~1938)


19~20세기 독일 철학자. 19세기 학문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상대주의에 반대해 현상 자체를 바라볼 때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하는 철학 사상인 ‘현상학’을 주창했다. 독일 프로스니초(현 체코의 프로스초프)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대학과 베를린대학, 빈대학에서 공부했다. 1907년 조교수로 재직했던 괴팅겐 대학 강의에서 처음으로 ‘현상학적 환원’에 대해 언급한 후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1911), 『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여러 고안』(1913) 등의 저서를 통해 현상학의 이념을 완성했다. “사실 그 자체로”라는 말을 통해 현상 자체에 다가가고자 한 후설의 학문은 근래에 ‘후설 르네상스’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각광을 받고 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가르침에 대해 감사드리며 이 글을 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철학이 무엇이며 어떻게 철학을 해야 하는지, 또 철학의 세계가 얼마나 광활한지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헤겔의 관념론이 붕괴한 후 철학이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된 20세기 초에 “철학이란 모든 것의 뿌리를 다루는 학문이다”라는 전통적인 철학의 이념을 부활시켜 나가면서 현상학을 전개해 나가셨습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철학의 이념을 부활시켜 나가면서 등장한 현상학은 물리학, 생리학, 역사학 등 개별과학을 철학의 토대로 간주했던 다양한 유형의 실증주의 철학과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물론 철학은 다양한 분과학문과 부단히 대화할 때에만 참다운 철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강조했던 분은 바로 과학론을 현상학의 중요한 주제로서 반복해서 다루셨던 선생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나 이처럼 철학이 다양한 분과학문과 대화해야 한다고 해서 철학이 분과학문과 유사한 것으로 탈바꿈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철학 나름의 고유한 본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선생님께서 창시한 현상학은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실증주의 철학과 구별됩니다. 실증주의 철학은 실증과학의 방법에 의지하면서 철학이 다루어야 할 본래적인 사태로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한계를 지닙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적 실증주의는 모든 현상을 일종의 물리현상으로 간주하면서 나름대로 커다란 선입견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에 물리현상과는 본성상 구별되는 의식현상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모든 현상은 일종의 물리현상이다”라는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우리는 의식현상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선입견과 관련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하면서 그에 대해 판단중지를 해야 합니다. 이 경우 ‘판단중지’는 그러한 선입견이 의심스럽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선입견이 의심스럽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그 선입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선입견에 대해 일체의 판단을 보류하는 판단중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의식현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리주의적 선입견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 그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판단중지를 통해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향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적 절차가 ‘현상학적 환원’입니다.

 

그런데 물리현상, 의식현상 이외에도 철학이 다루어야 할 현상은 다양하며 물리주의적 선입견과 더불어 또 다른 여러 가지 선입견들 역시 우리가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따라서 다양한 현상들을 그의 본성에 적합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적 환원이 필요하며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형상적 환원, 현상학적 심리학적 환원,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생활세계적 환원 등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수 없이 많은 현상들을 분석해 나가면서 현상학의 여러 영역을 개척하셨고 논리학, 과학론, 인식론, 존재론, 형이상학, 역사철학, 윤리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등 다양한 철학의 분야를 쇄신하셨습니다. 현상학의 영역이 얼마나 광활한가는 선생님께서 생전에 출간하신 여러 가지 저술 이외에도 책으로 출간할 경우 약 100권 정도에 달할, 4만쪽 가량의 유고를 남기셨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남기신 이처럼 많은 양의 글도 현상학의 영역이 얼마나 광활한지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처럼 엄청나게 많은 작업을 하시고서도 선생님께서는 70세가 넘으셔서 “나는 이제 겨우 현상학이라고 하는 저 ‘약속된 땅’이 얼마나 넓으며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헤겔 이후 철학의 정체성 위기 시대에 전통적 철학 이념을 ‘현상학’으로 부활시킨 철학자

 '현상학적 환원’은 모든 현상에 대한 선입견에서 해방돼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것


후학들은 선생님을 “라이프니츠 이래 최고의 철학자”라고 평가하고 선생님의 현상학을 현대철학의 거봉 중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거봉들을 품고 있는 웅장한 산맥”으로 평가합니다. 선생님의 조교였던 하이데거가 언젠가 “후설은 나에게 사태를 볼 수 있는 눈을 심어주었다”고 고백하면서 선생님께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다. 하이데거를 따라 저도 ‘사태를 볼 수 있는 눈’을 저에게 심어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뿐 아니라 선생님은 공부하는 사람이 언제나 간직하고 있어야 할 자세도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72세의 고령에 이르러 쓰신 어떤 글에서 선생님은 당신 자신을 ‘철학의 초심자’라고 부르면서 성경에 나오는, 천살 가까이 살았다고 하는 무드셀라를 부러워하셨지요. 몇 개월 또는 한 두 해 공부하고 어느 분야의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태에서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아주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선생님은 어떤 강의에서 “헛되이 명성을 추구하면 영속적인 가치를 지닌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계에서조차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오늘날 학문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태를 볼 수 있는 눈’을 심어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현상학은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못지않게 21세기에도 새로운 사태를 들춰내면서 현상학적 운동은 도도하게 전개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학적 운동의 과정 속에서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유형의 현상학들이 21세기에 출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선생님께서 ‘심어주신 눈’을 통해 사태를 보다 더 정확하게 투시하면서 새로운 현상학이 출현하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선생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남인 교수(인문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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