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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저녁을 포기하는 사람들취재 | 52시간 노동법으로 방황하는 공연계
  • 황지연 기자
  • 승인 2018.09.16 11:05
  • 수정 2018.09.1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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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근로를 포함한 최대 노동시간 주 52시간을 골자로 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적용 대상에 따라 순차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지난 7월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이 해당 법의 적용 대상이 되면서 많은 사람이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거란 예측이 이어졌다. 근무 시간 이후 여가를 즐길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문화예술계의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도 잇따르고 있다. 그런데 정작 개정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인 공연 예술계 종사자들은 퇴근 후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먼나라 이야기

개정된 근로기준법이 공연 예술계 현장에선 아직 피부로 와닿는 사안이 아니다. 공연 예술계 특성상 ‘최대 노동시간 주 52시간’을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이종승 위원장은 “대부분의 공연을 하는 스태프들, 특히 기술 담당이나 극장 상주 근무 스태프들의 일주일 근로 시간이 52시간을 넘어가는 경우가 빈번하다”며 “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법이 진행된다면 극장을 이용하는 단체들과 극장 상주 스태프들이 제대로 된 무대를 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판소리 공연 관련 단체의 기획을 맡고 있는 엄한별 씨는 “보통 무대 설치는 며칠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심지어는 갑작스럽게 주말 공연이 잡힐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그는 “약속된 기간 안에 준비해서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양질의 공연을 선보여야 하는데 이와는 상관없이 노동시간만 줄어들어 작품을 준비하는 데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중구 퇴계로에 위치한 충무아트센터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노조 측의 요구가 적힌 여러 개의 판넬이 서 있고 현수막이 걸려 있다. 주된내용은 인원충원과 안전한 노동 환경에 대한 요구다.

개정 근로기준법에 따른 변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곳이 있다. 바로 중구문화재단 소속의 충무아트센터다. 2018년 4월 기준, 8명의 무대기술부 소속 근무자가 6개월간 보장받지 못한 연장 노동 시간은 총 2,564시간에 달한다. 그러나 공연장 측은 10년간 연장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으며 법정 일 수에 해당하는 연차 휴가도 다 보상해주지 않고 있다. 이에 충무아트센터 노동자들은 인력 충원과 공연장 안전 점검 기간 연장을 요구하기 위해 지난 5월 11일 오후부터 현재까지 쟁의 행위를 이어오는 중이다. 충무아트센터 노조 윤태희 분회장은 “공연이 개막하기 전엔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무대 작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극장은 3개인데 비해 음향, 조명, 기계시설 모두 각 극장에 한 명씩밖에 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무대 스태프들의 계속되는 과로는 공연의 완성도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업무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려 안전하지 못한 작업 환경의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역설했다.


정책이 있어도 꿰어야 보배

실제로 개정된 근로기준법을 시행한다고 했을 때 문화산업계에선 콘텐츠 분야의 특수성으로 인해 근무 시간 단축이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지난 10일(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콘텐츠 분야 노동시간 단축 기본(1차) 가이드라인’을 배포했다. 이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같은 유연 근로시간제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가이드라인은 공연 관련 산업을 콘텐츠 업종에 포함하고 있지만, 유연 근로 시간제가 공연예술계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충무아트센터 노조 윤태희 분회장은 “무대 현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스태프와 교대로 일을 하는 것엔 어려움이 따른다”며 “업무가 익숙하지 않은 만큼 그를 보조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일을 해야 해 결국 누군가는 연장 근무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종승 위원장은 “상주 인력이나 스태프 외에 배역을 갖고 연습하는 사람들은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고 설명했다.

공연 준비 및 연습 기간이 노동 시간으로 산정되는지도 여전히 모호하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근로시간 해당 여부는 사용자의 지시 여부, 업무수행(참여) 의무 정도, 수행이나 참여를 거부한 경우의 불이익 여부, 시간·장소 제한의 정도 등 구체적 사실관계를 따져 사례별로 판단한다. 그런데 이는 게임, 방송, 영화와 같은 콘텐츠 업종과 달리 공연예술계의 사정엔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다. 이종승 위원장은 “공연계는 일괄로 계약을 하거나 공연 기관에 따른 노동 시간만 산정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질적인 노동 시간을 따지려면 연습시간이 포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엄한별 씨는 “많은 사람이 연습 기간을 노동 시간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보다 나은 예술 ‘노동’ 환경을 위해

주 52시간 근무제가 공연예술 노동자들에게 의미 있는 제도가 되기 위해선 인원 충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영세한 공연예술 업계에 무조건적인 인원 충원을 요구할 순 없기에 정부의 지원이 필요로 한다. 이종승 위원장은 “연습 시간을 노동 시간에 포함하더라도 기술 스태프 및 상주 인력 외의 아티스트들은 노동 시간만 단축한다고 해서 업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며 “인력을 늘릴 만큼 수익이 나지 않는 민간극장의 경우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윤태희 분회장은 “연장 노동, 연차 휴가, 과로 등 모든 문제의 핵심적인 해결책은 인원충원인데, 공연장들이 계속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공연예술 산업에 대한 정부의 예산 편성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문화 산업 정책의 세분화 및 구체화에 대한 요구도 제기되고 있다. 방송, 영화, 게임, 관광, 공연 등의 콘텐츠 분야를 ‘예술’이라는 이름 하나로 묶기엔 업종마다 그 특성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종승 위원장은 “다양한 분야가 있는 만큼 그 다양함을 반영해서 제대로 된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며 “공연예술인은 월급을 받는 상주 인력이 아닌 이상 일반적으로 직업 분류가 되지 않는다는 특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표준 계약서도 지켜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를 통해 업계 전반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지면 자연스럽게 계약서도 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윤태희 분회장은 “좋은 정책이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어도 그 정책이 현장에서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며 “정부의 꾸준한 감사와 평가를 통해 정책이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엄한별 씨 또한 “공연계 노동 방식에 대한 데이터 분석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며 “작은 것들이라도 문서로 만드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자신의 저녁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 또한 공연 예술 ‘노동자’임을 잊어선 안 된다. 더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정책과 정부의 지원으로 만드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도, 모두가 행복한 공연 예술계가 돼야 할 것이다.

사진: 유수진 기자 berry832@snu.kr

황지연 기자  ellie0519@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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