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설 교수

국어국문학과

오래전에 총장 측근에 있는 어떤 교수가 총장의 졸업식 축사 원고를 부탁해온 일이 있다. 나는 글도 잘 못 쓰거니와 그런 공식적인 글은 좋아하지 않아서, 내 원고는 총장님이 읽기 힘드실 거라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런데도 간곡히 부탁해서 마지못해 원고를 썼고 당연하게도 그 원고는 읽히지 않았다. 내가 사양한 실제 이유는 매번 이메일로 보내오는 총장 축사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늘 십 초 정도 훑어보고는 또 그 소리인가 하고 넘겨버렸다.

수년 전에 연구년을 받아 하버드대에 갔을 때, 마침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하버드대학에 무슨 상을 받으러 온다기에 구경 간 일이 있다. 반 총장이 수상 기념 연설을 하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하버드 케네디스쿨 연수 경험을 말해 청중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다. 그러고는 바로 유엔의 당면 과제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아마 유엔 홈페이지에 가면 다 있을, 그런 내용을 하나하나 말했다. 잘 시작했다가 결국은 지겨운 연설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친구와 대화할 때 상대의 말에 관심과 진정이 보이지 않으면 말을 잇고 싶지 않게 된다. 축사도 그렇고, 연설도 그렇고, 그 대본도 마찬가지다. 진정이 없으면 하나 마나 한 축사요, 연설이요, 글이다. 영혼이 빠진, 진정이 없는 표현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며 상대의 시간만 빼앗는 것이다. 그런 연설은 앞에 앉은 수백 명, 수천 명의 청중을 깨우지 못하고 잠들게 한다.

올해 2월 우리 졸업식에 천주교의 정진석 추기경이 축사를 하게 됐다. 그런데 추기경은 노령으로 건강에 문제가 있어 참석하지 못했고 대리 신부가 식장에 왔다. 추기경의 축사 시간에 연단에 선 대리 신부가 받아온 원고를 꺼낼 때 나는 귀를 막고 싶었다. 행사에서 축사는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축하를 전하는 것인데 축하하는 사람은 없고 목소리만 들린다면 진정한 축하라 할 수 없다. 인간 대 인간의 대등한 축하가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리는 축복처럼 여겨졌다. 굳이 그런 축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대리 신부가 입을 열었다. 추기경님이 축사를 읽지 말고 말을 짧게 줄이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당부를 전했다.

“(추기경님은 졸업생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여러분 모두가 ‘나는 정말 한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런 삶이 되길 바란다고, 그런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추기경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진정이 느껴지는 짧은 사랑의 메시지였다.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며 자기 삶을 사랑하기 바란다고,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나가는 어린 후배에게 충분히 사랑을 느끼게 하는 인상적인 대리 연설이었다.

졸업식과 입학식은 학기마다 해마다 반복되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생에 한 번뿐인 일이다. 서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가. 총장이 이런 중요한 행사에 와서 학생들을 감동시킬 메시지가 없는가. 누가 총장이 돼도 할 만한 뻔한 소리 외에 할 말이 없는가. 총장의 축사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멀뚱히 앉아서 시간만 보내야 하는가.

입학생과 졸업생을 감동시킬 진정을 담은 축사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총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총장을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말이 바뀌지 않는데 현실이 달라지길 기대할 수는 없다. 서울대의 사회적 책임이 엄중히 요구되는 현시점에 대학의 갈 길을 총장이 보여주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이번에 새로 선임될 총장에게 학생을 감동시킬 연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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