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연 문화부장

어렸을 때부터 ‘문화’라는 단어를 동경했다. 단지 다른 분야보다는 덜 딱딱해 보였고 재미있을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때 야자를 마치고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며 맡았던 선선한 밤공기가, 매일 아침 바쁜데도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지나가다 그림 한 점을 우연히 마주친 순간이, 그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내겐 문화였다. 이는 자연스레 내가 대학신문 문화부에 들어오게끔 했다. 문화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시 내게 ‘문화=재미’였는데, 그 두 단어의 연결성은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글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음에도 그냥 그 한 단어에 이끌려 지원한 것이다.

최근 대학신문 안에서 유행어처럼 번져가는 말이 있다. ‘대그왜다’라고도 하는 이 말은 ‘대학신문이 그걸 왜 다뤄야 하죠?’의 준말이다. 이 말을 계속 듣자 하니 이게 내가 다뤄야 할 소재가 맞는지, 이 문화행사엔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계속 재고해야 했다. 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소확행’의 문화는 잠시 잊게 됐고, 문화계에 하나의 의제를 던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대그왜다’라는 말을 짊어지게 되니 내가 바라봐야 하는 문화계는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세상 아름답게 비춰졌던 문화인들도 따져보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커리어를 이어가는 어쩔 수 없는 노동자다. 하지만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노동자와 달리 ‘예술은 배고픈 것’이라는 틀 안에 가둬져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그들을 둘러싼 문제들은 문화계에서 배출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결석과도 같아졌다. 문화부는 반짝이는 이름 뒤 존재하는 문화의 이런 어두운 단면을 조명하기도 했다. 예컨대 예술인이 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용 보험 토론회를 취재하거나, 여가를 위해 만들어진 52시간 노동법 개정 때문에 오히려 여가를 즐기지 못하게 된 공연계 노동자가 생김도 지적했다. 또한 문화부가 바라봐야 할 것 중엔 눈에 쉽게 띄지 않은 문화들도 있다. 사회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문화 이면에선 다양한 존재들이 주체가 돼 활동을 이끌고 있다. 그동안 문화부에선 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의 오케스트라 활동과 장애인의 문화생활을 위한 음악 점역 등을 소개했다. 또한 여성과 엄마의 노동에 대해 전시와 그들을 위한 애플리케이션을 이야기했다. 문화부에서 기사를 쓰고 보면서, 몇 분의 즐거움 속에서 실제 종사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잠깐이라도 고찰할 수 있었다.

‘대그왜다’라는 질문은 대학신문 기자들을 옥죄는 질문인 동시에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억지로라도 질문하며 대학신문에서 왜 이 문화를 다뤄야 하는지 고민했고, 그 고민은 대학신문에 왜 문화부가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줬다. ‘대학신문이 그걸 왜 다뤄야 하죠?’라는 물음은 문화부에서 더 좋은 소재를 발굴하게 했고, 이는 ‘대학신문이 왜 문화를 다뤄야 하죠?’라는 새로운 물음과 문화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내가 생각했던 문화에 대해 오히려 거리감마저 느껴진다. 불편한 진실이 가득 찬 부분도 있지만 문화는 내가 존재 의미를 충분히 찾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 과정은 내가 예전의 ‘문화’와는 멀어지게 했지만 또 다른 ‘문화’와는 가까워지게끔 했다. 지금 내가 다루는 문화는 모두를 위한 문화다. 문화부가 문화의 어두운 단면, 가려진 그늘을 다루면서 문화계가 더 빛날 수 있게, 재미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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