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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와 공존
  • 대학신문
  • 승인 2018.09.16 10:56
  • 수정 2018.09.23 12:23
  • 댓글 1
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그날도 아침부터 무척 더웠다. 양손에 짐을 들고 버스에 몸을 구겨 넣었을 때는 이미 땀을 꽤 흘린 상태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가 났다. 혹시나 내 몸에서 나는 냄새일까 싶어 연신 코를 킁킁댔지만 내가 범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옆자리에 앉은 아프리카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히 밝히자면 그녀가 냄새의 주인공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건 뒷자리에 앉은 다른 승객의 체취였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내가 확인하지 못한 내 소지품에서 발생한 냄새였을 수도 있다. 내가 불쾌하다는 듯 코를 킁킁대며 아프리카계 승객을 바라봤다는 것이 유일하게 명백한 사실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황급히 돌렸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나를 의식하기는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해명도 사과도 하지 못한 채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인종차별적 행동에 대한 사과였을까, 아니면 내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해명이었을까.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에 따르면 부패나 죽음, 동물의 유한성과 취약성을 연상시키는 속성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며, 악취 역시 이에 해당한다. 악취에 대한 혐오감은 인류에게 유용했다. 오염됐거나 부패해서 위험한 대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줬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취가 나는 대상을 피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당한 반응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꼭 부패하거나 오염된 대상에게서만 악취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악취를 느낄까? 사람의 체취는 유전자와 환경 모두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중앙일보」 2017년 7월 23일) 심지어는 후각도 유전자의 영향도 받는다고 하니, 인종적·문화적 배경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익숙하지 않은 냄새를 느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꽤 타당해 보인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는 불쾌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톰 밴더빌트의 『취향의 탄생』에 따르면 인간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이런 ‘악취’는 상대적이다. 그래서 아시아인 역시 누군가에게는 ‘냄새나는’ 이방인이다.

악취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라면, 어떤 계기로든 익숙해진 냄새는 좋아할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어글리 딜리셔스〉의 진행자이자 한국계 미국인 셰프인 데이비드 장은 김치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 변화에 대해 불평한다. 어릴 때는 또래 백인 친구들이 ‘집에서 쓰레기 냄새가 난다’며 괴롭혔는데, 김치가 유행하자 이제는 백인 셰프들이 뉴욕 한복판에 ‘퓨전 김치 식당’을 연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일화만 보아도 ‘익숙함’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 것인지 명백히 알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를 악취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회적으로 배척할 힘을 가진 것은 그 사회의 주류 집단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많은 문화권에서 악취와 같은 혐오스러운 속성을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미지와 결부시켜 왔다고 분석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악취에 대한 혐오감’과 같은 자연스러운 반응도 비도덕적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혐오가 공적 행위의 지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의 냄새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면, 악취의 근원이 무엇인지 찾으려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랬다면 본의 아닌 무례와 차별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공존은 상대의 악취를 견디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후각은 예민한 대신 금방 지친다. 그래서 대부분의 냄새는 잠깐만 견디면 의식하지 못한다. 그 잠깐을 견딜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하다.

신중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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