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축물에는 그 나름의 기능적 목적은 물론 함께 표상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 특히 20세기의 모더니즘 건축가들에게 건축은 한 시대의 의지, 곧 ‘시대정신’의 표상이었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내 모더니즘 건축물들, 조금 더 세부적으로는 국경을 뛰어넘는 보편적 건축 미학인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에 부합하는 건축물들은 그 시대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본 행정관


공법과 재료

콘크리트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부산물이다. 당시 급격한 도시화로 토지 활용도가 중요해졌다. 몰려드는 거대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빠르고 저렴하게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건축적 양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콘크리트는 이 요구에 완벽히 부합하는 재료였다. 홍성걸 교수(건축공학과)는, “압축성이 강한 콘크리트의 인장력을 보완해주는 철근이 결합한 철근 콘크리트는 목재나 돌과 같은 건축 재료를 통한 공법보다도 스팬*을 더 확보하고, 다층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함으로써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유럽의 모더니스트들은 콘크리트를 값싸고 튼튼한 공간을 많은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물질로 받아들였다. 유럽의 모더니즘 건축물은 이렇게 물질과 공법, 정신의 결합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상이자 기념비였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전후 복구의 필요성과 신생독립국가의 건축적 수요에 힘입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근대적 공법 기술인 ‘철근 콘크리트’를 선택해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황에서 안전하고 신속하게 건물을 짓고자 했다. 관악캠퍼스는 기술적인 타협을 통해서 지어졌지만, 건축물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은 건축가들에게 건축물에 민족적 건축요소를 활용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었다. 전봉희 교수(건축학과)는 “전후 신생 독립국에서는 민족적 민주주의 그리고 케말리즘(Kemalism)이라는 전폭적인 서구화 추구라는 두 갈래의 정치 이데올로기 체제를 취했다”며 “이 둘 중의 한국의 실정은 첫 번째에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민족적인 것을 부각하는 것은 군부독재 시대 때 더 심했는데, 전 교수는 이를 두고 “충과 효와 같은 위계적 질서를 통해 거국적 모순을 호도하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서울대학교 종합화는 당시 가장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서울대 관악캠퍼스는 당대 한국의 최고 건축가들에게 각각의 건축물을 설계하도록 배분하고, 한 명의 총괄 책임 건축가(Master Architect)가 캠퍼스 전체를 계획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이에 따라 개별 건축가의 이름이나 독창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혼란한 눈

보이는 것과 의미하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혼란함은 꽤나 섬뜩한 경험이다. 건축물이 읽히는 방향이 세대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이념을 바탕으로 하던 이전 세대의 거대 서사가 사라진 현재를 살아가는 요즘 세대는 서울대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건축물을 바라보기도 한다.

완공 직후의 행정관은 건물이 표상하는 평등이라는 이상적 가치에 부합하듯 학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특히 당시 행정관 2층에는 전산실이 있어 실제로 교직원이 아닌 사람들도 종종 출입했다. 하지만 학생 수가 급증하고, 학교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행정관에서 담당하는 업무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행정관 건물 내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시설들은 캠퍼스 내 다른 건물로 분산 이전됐고 행정관은 지금의 폐쇄적인 형태로 남게 됐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건물의 용도가 변화했고, 따라서 사용자가 달라진 것이다. 건축물의 형태 자체는 건물이 지어졌을 당시에 표상하던 가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만, 그 가치와 다른 시간에 사는 이들의 건축적 경험에서 그 가치와 비롯된 의미 사이에는 괴리가 생겨났다.

예술관(미대)1 전경


길을 잃는 곳

학교의 위치가 도시의 한 중심부였던 1963년 4월부터 1972년 8월까지 1970년 이전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던 연건동 교사는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미대는 동숭동에서 현 관악구 부지로 이전하기 전 몇 차례에 걸친 이동이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배경은 당시 본교 미대 학생들의 사회참여 리얼리즘 예술(Social Realism)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캠퍼스 종합화 계획단계에서 정부는 일본 도쿄대를 따라 음대와 미대를 분리하려 했으나, 계획이 변경돼 음악대학과 미술대학의 건물인 ‘예능관’이 2단계 시설 공사(1974년~1975년)의 하나로 기획되고 1975년 12월 완공됐다. 예능관(현 예술관)은 일부 건축가들과 건축사가들 사이에서 거장으로서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토대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김수근의 작품이다. 미로와 같은 특성을 가진 이 건물은 형태 면에서 같은 시대 지어진 관악캠퍼스 내 다른 건물과 많은 차이가 있다. 행정관이 내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관리에 최적화된 건물이라면 예능관은 그와 정반대다. 가운데의 넓은 마당을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건축물은 여러 부분으로 분리되고, 분리된 부분 안에서 또 여러 부분으로 분리가 돼있는 형태다. 전봉희 교수는 이 구조를 두고 “예술에 대해 적지 않은 이들이 기대하는, 자유롭고 위계 없음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분리된 작은 부분들의 합이 단순히 부분들의 합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라는 관념의 건축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행정관 지상 5층 도면. (사진제공: 시설관리국 시설지원과)
예술관(미대)1 지상 3층 도면. (사진제공: 시설관리국 시설지원과)

전봉희 교수는 “예술대학이라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지식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와는 조금 동떨어진 곳에 예술관이 세워졌다”며 이는 “해외 원조를 통해 서구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던 여타 학술과 달리, 예술은 민족적 측면을 돌아보는 동시에 각자의 개별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것이 옮다고 여겼다”는 해석을 덧붙였다.

예술관(음대) 창문
예술관(미대) 창문 밖: 창문 외부에서 내부를 조망하기 힘들게 돼있다.
예술관(미대) 창문 밖

김수근은 그를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는 건축가다. 그는 개발 독재 시대 정권과 밀접하게 일했다. 실제로 당시 대규모 국가 건설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건축물과 도시계획은 김수근의 작품이었다. 특히 예술관이 지어지고 한해 뒤인 1976년에 완공된 그의 대표작 ‘남영동 대공분실’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을 포함한 적지 않은 민주주의 열사들의 고문과 죽음이 자행된 곳이다.

중앙도서관에서 본 ‘아크로폴리스’. 1980년 4월에 열린 비상학생총회의 풍경이다. (사진제공: 『(大學新聞 사진으로 본) 서울대학교 50년 : 1952-2002』)
1985년 4월 총학생회 출범식이 열렸던 ‘아크로폴리스’의 풍경. (사진제공: 『(大學新聞 사진으로 본) 서울대학교 50년 : 1952-2002』)

1989년 9월 서울지역총학생연합(서총련) 진군식. (사진제공: 『(大學新聞 사진으로 본) 서울대학교 50년 : 1952-2002』)


눈을 조이면 보이는 것들

특정 건축물의 주변에는 건물의 용도와 건축이 표상하는 가치에 따라 새로운 용도가 생겨나고, 적지 않은 이들이 그 용도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이름이 생겨난다. 건축의 안과 밖, 시간, 그 장소를 사용했던, 하는 사람들. 이들은 서로를 마주하고 응시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의미를 생산하고 증명하는 존재가 된다.

서울대 종합화 과정에서 전체 캠퍼스가 관악산으로 이전된 후, 관악캠퍼스에서 수학한 이들은 소위 ‘관악 세대’라고 불렸다. 당시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공간인 행정관과 도서관 사이 광장은 ‘관악 세대’에 의해 ‘아크로폴리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김정희 교수(서양화과)는 이에 대해 “80년대 이후 데모의 대중화가 일어났으며, 당시 학내에서 분신자살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뛰어내리는 학생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1981년 5월에는 도서관 6층에서 김태훈 열사가 광주항쟁 진상규명 시위 중 투신했고 1986년 5월에는 학생회관에서 이동수 열사가 분신투신 했다.

전봉희 교수는 건축물을 “사용자에게 실존적인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 말했다. 건축물의 이용자에 따라 유령은 길을 잃은 망령이 될 수도 있고 현실을 저주하는 악령이 될 수도 있으며, 묘비는 기념비가 될 수도 있지만, 단지 논문을 작성하던 곳이 될 수도, 평생의 친구를 만난 곳이 될 수도, 강의를 들으며 하루를 보내는 일상적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서울대의 근대 건축물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이용자에 따라 그 용도가 변해왔다. 건축물은 그 표면은 단단할지 몰라도, 그 의미만큼은 시간과 함께 유기적으로 변화하며 호흡하고 있다. 서울대의 근대 건축물은 여전히 시대를 유영하고 있는 무덤 없는 유령의 거대한 묘비와 다를 바 없다.

*스팬(Span):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

레이아웃: 강세령 기자 tomato94@snu.kr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