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갉아먹은 미술품의 상처를 치료하는 의사
시간이 갉아먹은 미술품의 상처를 치료하는 의사
  • 홍지윤 기자
  • 승인 2018.10.0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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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겸 보존·복원전문가를 만나다

30여 년 전, 한 청년은 역사가 남긴 흔적을 지켜야겠다는 열정에 불탔다. 청년은 그 열정 하나로 낡고 망가진 과거의 물건을 복원하는 일에 뛰어들었고, 이후 수많은 작품이 그의 손끝에서 재탄생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많은 작품의 수명을 연장하고 되살리는 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자청하는 보존·복원전문가 김겸 씨를 일산동구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에서 만났다.

인공지능이 보존·복원전문가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김 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복원은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가치 판단은 인간의 영역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모습에서 복원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작품에 새 숨을 불어넣는 사람이 되기까지

김겸 박사가 처음부터 보존·복원전문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인 화백 김수익 선생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온 그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어릴 적 그는 “집에는 다른 책보다 명화집과 같은 예술 서적들이 많았다”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의 꿈과는 달리, 그의 부모님은 김 씨가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그는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고 자연스럽게 화가라는 꿈과는 멀어졌다. 하지만 미술을 향한 그의 마음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김 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며 “결국 부모님과의 타협 끝에 미술 이론을 배우는 예술학과에 진학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 입학했다.

서양미술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김 씨는 1997년 삼성미술품보존연구소에 취직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과 보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그는 “입사할 때만 해도 보존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 잘 몰랐다”며 “한 잡지에서 ‘국립현대미술관 보존실’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것이 보존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였다”고 말했다. 입사 후 그는 로뎅과 브루델과 같은 조각가의 작품을 복원하고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김 씨는 “가장 말단에서 보조의 보조역할로 복원에 참여해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았음에도 그 일이 너무나도 재밌었다”며 “복원을 내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의 설렘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씨는 IMF의 여파로 정리해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김 씨는 앞으로 제3자가 자신의 거취를 정하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복원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2년간 일본 전통 목조 불상 복원가인 마키노 다카오 선생 밑에서 목조 건축물의 복원을 배웠다.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의 조각 복원에 대한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주지 못했다. 그는 목조 건축물 복원보다 조각 복원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씨는 영국으로 넘어가 두 번째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영국 링컨대에서의 공예사 수업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말했다. 김 씨는 공예사 수업을 통해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는지를 직접 체험했고 복원가로서 자신의 역할과 복원의 가치를 깊이 깨달았다. 그는 “공예사 수업 중 존 로드 교수가 영국 귀족이 공예품을 사면서 기록했던 가계부 일부를 제시한 적이 있다”며 “그 가계부에 기록된 공예품이 현재 영국 V&A 박물관에 전시돼있는 것 중 어떤 공예품과 가장 유사한지를 찾고 그에 대한 이유를 기술하는 것이 과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제를 하며 역사는 가계부와 같이 누군가가 남겨놓은 자그마한 종잇조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그 어떤 것도 아무 이유 없이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김 씨는 복원하는 물건의 가치를 매기지 않고 모든 것을 소중하게 다룰 것을 다짐했다. 김 씨는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동안에도 좋은 성적을 위해 단순 암기 위주의 공부를 해왔었다”며 “정작 내가 공부한 역사책의 페이지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엇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의 배움은 그가 작품을 복원할 때 갖는 태도에 큰 영향을 줬다. 그는 “내가 복원하는 하나하나가 어떤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을 생각하면 어떤 작품 하나 대강 넘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4년의 유학 생활을 마친 김 씨는 한국에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팀 총괄팀장을 거쳐 현재는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소장으로 보존·복원에 힘쓰고 있다.



시간을 복원하는 유물 의사

김 씨는 복원의 과정을 환자를 고치는 의사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는 “작품을 환자로 생각하면 모든 과정이 똑같다”며 “응급환자가 내원하면 응급수술을 하듯 어떤 작품은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복원을 한다”고 설명했다. 마침 인터뷰 당시 그의 작업실에는 어제 입원한 작품이 김 씨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 그는 “어떤 작품은 상태 진단을 하고, 복원 계획을 세우고 복원을 한다”며 “이는 환자가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수술이라고 해서 다 그 방식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는 “유물과 미술품의 복원은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유물은 그것이 만들어졌던 당시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기 위해 복원한다면 미술품은 완벽한 외형을 갖춰 감상할 수 있기 위해 복원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미술품 복원은 성형외과 치료에 가깝고, 유물은 정형외과나 일반외과 치료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편하다”며 웃음을 지었다.

복원의 핵심은 물질이 아니라 그 물질이 지닌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에게 복원가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에 관해 묻자 “자신이 복원하는 것의 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16년, 김 씨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한 바 있다. 그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하면서 가치를 복원하는 것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했다. 김 씨는 “으스러진 운동화 밑창을 복원하며 그 작업의 의미를 되물었던 적도 있었다”며 “하지만 이 운동화가 누군가에게는 단단히 잠겨있던 자물쇠를 푸는 열쇠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복원에 임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복원에 임했던 김 씨는 이를 통해 기적을 경험했다. 그가 복원한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소재로 2016년에 소설 『L의 운동화』가, 2017년에 영화 <1987>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내가 복원한 운동화 한 켤레를 시작으로 많은 작품이 나오고 그를 통해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까지의 역사가 재조명돼 놀랍고 기쁘다”며 “복원을 통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기에 난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 씨는 보존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 자신의 재능을 나누며 사람들이 남긴 가치있는 흔적을 보존한다. 그는 세월호 피해 고등학교인 안산 단원고 ‘기억의 교실’ 칠판에 분필로 빼곡하게 적혀있던 메시지를 보존했다. 김 씨는 “분필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쉽게 지워질 수 있었는데 이를 고착화하는 작업을 해서 지워지지 않도록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유물 복원에서 나아가 김 씨는 보존이 필요한 작품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그것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았다. 마르셸 뒤샹의 작품 중 하나인 ‘슈트케이스’(1910)가 그의 손을 거쳐서 복원됐다. 그는 “그 작품이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인 만큼 접착돼있던 부분이 다 낡아 있었다”며 “이를 복원하기 위해 전체를 분해해서 재조립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서울 시내를 오가며 익숙하게 접하는 작품인 청계천의 ‘스프링’(2006)과 광화문 앞의 ‘이순신 장군 동상’(1968)도 김 씨가 복원한 작품 중 하나다. 길을 오가며 내가 보존한 작품을 볼 때 그는 “그 작품이 처음 제작된 형태에 가깝게 복원이 된 것을 보면 그 자체로 기쁘다”며 “하지만 그 작품에 대해 구석구석 잘 알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부분을 유심히 보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보존·복원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열정

복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개선은 김 씨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복원을 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이라며 “망가진 작품을 복원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의 가치마저 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씨는 복원에 대한 인식이 해외와는 다른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물에 대한 애착이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지금의 수준까지 발전하기 위해 앞으로만 전진한 나머지, 과거의 소중함을 느끼며 되돌아보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씨가 올해 책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를 낸 것도 그의 복원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이 유물의 가치에 대해 곱씹어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복원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는 김 씨지만 보존·복원전문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동작을 오랫동안 반복하는 것에서 오는 신체적인 부담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김 씨는 “복원을 하려면 힘을 세게 주는 것보다 똑같은 힘을 일정하게 주는 게 중요하다”며 “이렇게 신경을 쓰며 힘 조절을 하다 보니 양손의 모든 관절에 근막염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복원할 때를 회상하며 “당시에 아무도 그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 큰 동상을 혼자서 다 복원했다”며 “그 작업을 하면서 왼손이 다 망가졌고 그 이후로는 오른손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신체적인 부담감이 있지만 김 씨는 앞으로도 보존·복원전문가로서 꾸준히 활동할 예정이다. 그가 쉼 없이 다양한 작품을 복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원만이 자신의 길이라는 믿음에 있다. 그는 “나는 복원하는 일에 큰 애정이 있고 이것이 곧 취미이자 일”이라며 “한 번 작업을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작업에만 몰두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그가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복원을 통해 자신이 조금이나마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보존·복원에 대해 애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약간의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며 “복원을 통해 역사의 빈 곳을 메우며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낡고 힘을 잃어가는 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너무나도 쉽다. 하지만 단순히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태도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빠른 발걸음이 과거를 되돌아보는 발걸음과 속도를 맞춰갈 때 현재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잊기 십상인 요즘, 김 씨의 손끝에서 재탄생한 수많은 유물과 미술품의 이야기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바라본다.

사진: 대학신문 snupress@snu.kr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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