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형 기자

사회부

고등학교 화학에선 기체를 분석할 때 편의를 위해 몇 가지 가정을 도입한다. 기체 입자의 크기는 무시하고, 충돌을 제외하면 기체 입자 간의 상호작용은 없다는 등의 가정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실의 기체를 ‘이상기체’로 만들고 나면, ‘이상기체 상태 방정식’이라는 간단한 식으로 기체 분석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양한 가정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상기체’일 뿐이다. 때론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어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현실엔 그대로 적용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몇 가지 변수를 더 고려하면 ‘반 데르 발스 상태 방정식’이라는, 조금 복잡하지만 그만큼 현실 기체를 더 잘 설명해주는 방정식을 얻을 수 있다. 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면 식은 더 복잡해지만 설명은 더 정확해진다.

가끔씩 이상기체 상태 방정식으로 모든 기체를 기술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난다. 간단한 모형을 모든 현실에 끼워 맞추려 하는 사람들이다. 이번에 취재한 태극기 집회가 대표적인 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모조리 틀린 건 아니다. 북한은 여전히 지금까지 자행한 수많은 도발에 대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이후 경제 지표가 악화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함수식에는 누락된 항들이 많다. 국군의 날 행사에서 문 대통령이 강한 국방력을 강조한 것, 북미 정세가 변화한 것 등은 그들의 식에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에 아인슈타인의 우주 상수처럼 그들의 ‘박정희 상수’까지 포함시키면, 만능 ‘자유민주주의’ 함수가 탄생한다. 그들은 이 하나의 함수식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한다. ‘문재인 방북’을 대입하면 자동으로 ‘빨갱이 정권’, ‘박정희 찬양’을 넣으면 ‘애국 보수’라는 함숫값이 도출되는 식이다.

비단 이 집회에서만 보이는 문제는 아니다. 식의 종류만 다르다 뿐이지, 이런 해석은 종종 우리 주위에서 보인다. ‘불이익을 받는 당사자의 성별’이라는 단 하나의 변수만 고려하는 일변수 지시 함수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장관 후보자가 객관적인 결격 사유가 많아 반대를 받더라도, 그 사람이 여자라면 여성혐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PC’(Political Correctness) 방정식으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도 있다. 중세 시대 유럽 내의 전쟁을 그린 영화라도 유색 인종이나 여성이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모두 세상을 지나치게 간단한 방정식으로 기술하려는 시도에서 빚어진 착오다.

기체의 부피, 압력, 온도 등 이상기체 상태 방정식에서 고려하는 항들은 모두 기체를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 하지만 이 식만 가지고 현실 기체를 분석한 논문을 쓴다면 학계의 비웃음만 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 성별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 소수자를 존중하는 것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것만 가지고 만든 ‘간단한 모형’으로 세상을 분석하려 한다면, 틀림없이 오류가 생긴다. 내가 만든 식이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가? 현실이 잘못됐다고 외치기 전에, 내 식에서 빠뜨린 변수가 있나 먼저 점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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