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준범 사회부장

고등학생이 되면서 주변에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아졌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은 담배연기로 가득했고 친구들과 어딜 가든 담배 몇 갑은 항상 쫓아와 자리를 같이 했다. 한번 펴보라는 권유에 손사래 치는 게 일상이었고 소속감에 목을 매단 나이에 그 권유를 뿌리치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3년 내내 계속되는 유혹에 휘둘리지 않도록 버틸 뿐이었다. 언뜻 자랑스러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3년의 역사’를 떠올리는 건 무척이나 괴롭다. 우월감과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내 ‘대롱눈’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윤기의 단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1 - 직선과 곡선」은 타인과 타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깊이, 그리고 제대로 봐야 한다고 얘기한다. 주인공 ‘나’는 세상을 한쪽으로만 보는 ‘대롱눈’을 가지고서 타인을 쉽게 경멸하는 존재로,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놀랄 정도로 똑같다. 담배는 무조건 ‘악’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담배를 거절하는 건 내 도덕적 허영심을 높여주는 하루 일과였다. 나는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는 ‘착한 아이’여야 했고 그들은 내 우월감을 지켜주는 ‘나쁜 친구들’에 머물러야 했다. 친구들을 구별하는 일에는 흡연 여부가 제일 중요했고 인간관계의 절대적 기준이었다. 타인의 삶 중에서 너무나도 얇은 단면만 본 채 쉽게 경멸해 버리는, 영락없는 ‘대롱눈박이’였다.

고등학생의 신분에서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편했다. 교칙이든 사회적 시선이든 옳고 그름은 딱 떨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교과서에 한정된 생각이었다. 단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 흡연여부는 사소한 것을 넘어 쓸모 없는 기준으로 전락했고 보다 건설적인 기준들이 세워졌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의 대학생활은 ‘대롱눈’을 해체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중립기어’를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해야겠다. 가만히 있지만 주는 힘에 따라 앞뒤로 움직일 수 있는, 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어떤 사안이든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고 곱씹어보는 것.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학에 와서 겪은 가장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롱눈’을 경계하고자 하는 조급함이 앞서 기사를 쓰는 일이 무서워질 때가 종종 있었다. 지레 겁먹어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은 아예 다루지 않거나,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의 찬반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데 그치곤 했다. ‘대롱눈박이’가 쓰는 기사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되려 자신의 편견과 매너리즘에 갇힌 채 다시금 ‘대롱눈박이’가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사회부장을 맡으면서 기자들의 기사를 검토할 때면 내 매너리즘이 기자의 표현방식을 과도하게 억누르는 건 아닌지 매번 고민하게 된다.

모든 사안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입장과 의견을 모두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적 중립에 매몰된 기사가 천착하는 가치는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니고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지도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내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쓴 기사는 여러모로 부족한 것들 투성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이번을 계기로 기사를 검토하는 내가 또다른 ‘대롱눈박이’가 되지 않기를, 그렇게 옛날의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