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문학평론가 신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오늘날 사회에서 타인의 감정이 개인과 사회에 갖는 의미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미투’ 운동과 같은 사회적 현상을 거치며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돼 살아왔던 개인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고 있으며, 타인의 감정에 대한 성찰도 재조명되고 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그의 신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 쉽게 공감하기 힘든 타인의 슬픔에 주목했다. 『대학신문』에서는 지난 5일(금) 합정의 한 카페에서 신 평론가와 만나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가 어떤 것인지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신형철 평론가가 슬픔에 대한 ‘공부’라는 표현을 떠올린 것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였다. 그는 『눈먼 자들의 국가』의 「책을 엮으며」를 쓰며 처음으로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처음에는 국가적 비극에 대해선 국가적으로 애도하는 문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 평론가는 “시간이 지나며 몇몇 사람들은 유가족을 비난하고 조롱했다”며 “생각할수록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점차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 주제를 피했다”고 얘기했다. 그는 “같은 처지가 아니면 슬픔을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진다고 느꼈다”며 “슬픔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공부라도 해야 된다”고 설명했다.

슬픔에 대한 공부는 일종의 결함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된다. 신 평론가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일종의 결함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이 공부를 ‘슬픈 공부’라고 표현했다. 타인의 감정을 공부한다고 해도 이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타인의 슬픔에 대한 이해를 포기해선 안 된다. 슬픈 사람이 어떻게, 왜 슬픈지 모르는 것은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신 평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고 노력하는 게 사랑”이라고 말했다. 신 평론가는 “내가 당신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자신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다”며 그것이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고 답했다.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에 대한 공부는 낙관적이기만 한 기대가 아닌 현실을 직시하며 타인에게 힘이 되고자 한 마음에서 시작됐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엔 그가 슬픔에 대해 고찰한 대표적인 두 사례가 소개돼 있다.

◇‘지겹다’는 표현에 담긴 타인의 슬픔=「당신의 지겨운 슬픔」에서 신 평론가는 왜 슬픔에 ‘지겹다’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그는 인터뷰를 통해 ‘지겹다’는 표현이 사회와 개인의 두 측면에서 상이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먼저 슬픔에 지겹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이유로 공감능력을 떨어뜨리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든 사회적 요인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긴 노동시간이나 청년 실업 문제 등 살기 힘든 환경이 사회적 공감도를 낮추고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위험성을 지닌다. 신 평론가는 “사회적 요인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모든 이유를 사회적 요인에서 찾게 된다면 이는 개인의 부정적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며 “그 때문에 이는 절반 정도만 맞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지겹다’는 표현을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개인적 측면에서의 의미도 살펴봐야 한다. 신 평론가는 “‘지겹다’고 말하는 것이 미묘하게 죄책감의 표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우선시하며 자연스럽게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런다고 슬퍼하는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그는 우리가 슬픈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과 미묘한 죄책감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신 평론가는 “그 죄책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지겹다’는 표현으로 감정의 화살을 슬픈 사람들에게 돌린다”며 “이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지겹다’는 표현에는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반성이 함축돼 있다.

◇잘못된 위로의 위험성과 위로를 통한 사랑의 재해석=위로는 필연적으로 슬픔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위로는 슬픈 사람과 그 주위 사람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다. 신 평론가는 잘못된 위로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위로를 통해 사랑이 어떤 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신 평론가는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에서 휴식을 슬픈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진정한 위로로 꼽았다. 그는 “잘못된 위로가 슬픈 사람을 해할 수 있다”며 “타인이 건네는 위로가 진정으로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슬픈 사람이 더욱 지칠 수 있다”고 말했다. 슬퍼하기에도 지친 이가 타인의 위로에 반감을 느낄 때, 그 사람은 위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환멸을 느낀다. 신 평론가는 잘못된 위로는 슬픈 사람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며 “위로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인식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신 평론가는 ‘사랑’이 위로와 결부되며 어떤 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도 언급했다. 그는 “사랑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결여를 서로 나눠 갖는 것”이라며 “결여를 없애주는 게 아니라 결여가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도록, 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이 한정된 에너지를 가진 인간이 서로를 위로하며 살기 위해 택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스포츠 경기에서의 일대일 마크에 비유하며 신 평론가는 “사랑도 불완전한 존재끼리 서로의 위로를 담당해주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제목에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지 않고선 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조가 담겨있다”며 “표지의 그림을 통해 내가 슬픈 사람의 뒷모습이나마 쳐다보고 있다는 의도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타인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매개라는 점에서 신 평론가는 문학이 슬픔 공부의 적절한 교과서가 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개인의 경험이 언어화된 문학을 통해 독자는 자신의 체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경험할 수 있다. 신 평론가는 “모든 교과서가 그렇듯 문학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공부를 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문학, 그리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신 평론가는 “사람들이 문학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감정을 공부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진: 황보진경 기자 hbjk0305@snu.kr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