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들은 수업 시작 전에 늘상 주제에 대한 정의를 다루곤 한다. 정의는 무엇을 이해하는 데 첫 단계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종영한 ‘미스터 션샤인’에서 애기씨가 “러브가 무엇이오?”를 물어보는 장면도 본격적인 애정전선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무언가를 아는데 정의만한 간편한 도구가 없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 단 하나로 정해진 정의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의미들은 여러 가지들을 뻗어갔다. 그리하여 단어의 통일된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단어들이 많아졌다. ‘사랑’이라고 했을 때 악수, 허그(hug)를 말하거나, 부모 자식의 사랑을 말하거나, 성애를 말하기도 한다. 의미의 파생이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정의에의 자유를 양분삼아 시는 풍부해졌고 관점은 다양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각기의 정의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강제의 대상이 같은 사람이 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흑인은 미개한 인종’이라는 정의는 영문도 모르는 흑인을 노예로 만들었고, ‘유대인은 열등하다’는 정의는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 지금도 ‘동성애는 정신병’이라는 정의는 동성애자들을 사회 속에서 배제시키고 있고 중동에선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신의 뜻’에 따라 희생시키고 있다. 집단화된 정체성 안에서 개인은 인간성을 잃는다.

성차별 문제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 ‘여성’이라는 단어는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정의를 강요받았다. 헤게모니가 여성 순응을 더 용이하게 만들면서 여성 개인의 정체성은 점점 정의의 폭력 하에 스러져갔다. 명품 수집을 취미로 하는 개인은 ‘김치녀’로 운전에 서툰 개인은 ‘김여사’로 치환됐다. ‘열등한 여성’이라는 집단 정체성은 개인에게 족쇄가 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릎이 늘어난 운동복을 입고 아무렇게나 머리를 자르고 다니던 나는 ‘여자답지 못하다’는 수식어와 늘 함께였고 때때로 그 수식어가 마음에 들었다. 여성스럽다는 의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일종의 선고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여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여자라는 집단보다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한다. 나도 이제야 나 자신의 정의를 타인에게 위임했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몇몇은 그런 정의에의 탈출을 위해 또 다른 정의의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미러링’으로 ‘한남’ 개념을 만들어 찌질하고, 못생기고, 성추행을 일삼는 집단 정체성을 남성에게 부여했다. 남성 개인은 자신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폭력에 분노하고 페미니즘 자체를 다시 사회악으로 정의해 페미니스트들에게 돌을 던진다.

디지털 성범죄 역시 남녀갈등의 한 축으로 소비되며 정의의 폭력이 발발됐다. 피해자의 여성으로서의 가치, 성적인 매력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도 하고 ‘피해자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정말 중요한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자 지원 등에 대한 담론은 힘을 잃고 있다. 진짜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제된 정의 뒤에도 살아있는 사람이 살고 있다. 그들에게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 최소한이 있다. 무지함에서 비롯된 정의의 폭력은 유구한 역사 속에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디지털 성범죄를 바라보는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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