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사진부장

지난 2일, 모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다가 실소를 금치 못한 일이 있었다. 바로 옆에서 성게 라면을 시켜 먹던 여자가 갑자기 먹던 라면을 두고 김치를 사 오더니, 점원에게 다짜고짜 “라면을 김치 없이 먹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라며 화를 낸 것이다. 그 식당은 음식을 주문하면 반찬을 따로 주지 않는 곳이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직접 ◯◯집 김치를 사다 먹던 여자는 라면에 김치를 주지 않는 게 ‘정상’이냐고 역정을 냈다. 평소 같았다면 나는 손님의 말도 안 되는 억지 갑질에 화부터 났을 테지만 웬일인지 웃음이 나왔다. 라면을 먹을 때 김치 대신 우유를 같이 마시는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주에 너무도 어긋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리 죽여 웃다가 손님에게 혼이 나던 점원과 눈이 마주쳤는데, 아마 점원 눈에는 그런 나도 김치 타령을 하던 손님 못지않게 특이해 보였겠지.

나는 왜 그 손님의 말을 듣고 웃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면과 김치를 함께 제공하지 않는 게 ‘비정상’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그 손님의 모습은, 사실 민망하게도 우리 모두의 일상과 꽤 닮아있다. 우리는 주변에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보통’ 혹은 ‘정상’에 가까운지 끊임없이 재단하며 살아간다. 익숙하지 않은 걸 봤을 때,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도 우린 함부로 그걸 비정상으로 규정해 선을 긋곤 한다. 그 과정에서는 여자 손님처럼 분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몇은 혀를 차며 배척하고, 몇몇은 애써 의미를 부여해 본인의 불편한 감정을 합리화한다.

가령 한 장발의 남자를 발견했다고 해보자. 혹자는 보기 싫다며 혀를 차고 눈을 돌릴 것이며, 누군가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볼 것이다. 개중에는 개성 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이 멋지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기르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냐 물으면, 이들은 남자는 머리가 짧은 게 ‘정상’이라는 자의적인 이유 외에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론 겨울에 귀가 시리지 않으려면 머리가 긴 게 좋으니, 오히려 머리를 짧게 유지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머리가 긴 남자를 한순간에 ‘비정상’의 범주에 집어넣고 편견 어린 시선을 보내곤 한다. 그리고 머리가 길어서 멋지다며, 당신이 아니면 소화하지 못할 스타일이라며, 자신이 느낀 불편한 감정에 대해 애써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걸까? 대체 무엇이 그렇게 틀린 걸까?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행동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걸 보면 당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성향이나 정체성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게 타인에게 분명한 피해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상’을 규정하며 자신의 기준을 드러내는 불편한 시선은 그 자체만으로 타인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정상과 비정상을 재단하는 평가적인 시선을 거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 사람은 서로 다른 게 ‘정상’이지 않나.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나는 김치 없이도 라면을 잘 먹는다. 오히려 어릴 적부터 라면에는 항상 우유를 같이 마셨다. 짠 라면에 짠 김치를 곁들여 먹기보다 우유를 같이 마셔 라면의 짠맛을 씻어내는 것이다. ‘평범’하진 않지만, 어찌 보면 꽤 합리적인 식습관을 가진 셈이다. 나는 비정상인가? 나 때문에 누군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말해달라. “그럴 수도 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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