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

정치외교학부 석사과정

정치적 선택은 이성과 논리 추론의 영역일까? 우리는 가치의 실현을 위해 여러 대안을 저울질한 뒤 판단을 내릴까? 교과서에서 그려지는 민주 시민이라면 으레 그럴 테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이성의 수고로움을 감내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우리는 날마다 바쁘고, 정치보다 재밌는 것들은 넘쳐난다. 매 선거에서의 선택은 진지한 합리의 함수 값이라기보단 ̒느낌적인 느낌̓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의 이유를 대야 할 때면 그것이 이성적 판단이었음을 나직하게 자부한다. 갖가지 논리적 근거들로 포장된 답변을 내놓는다. 현실은 녹록지 않더라도 이성적인 시민이 돼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심 품고 있어 그렇다.

몇 해 전, “보수 진보 체질 따로 있나?”“알통 굵을수록 보수”라는 타이틀의 뉴스 보도는 자신의 이성적 판단력을 믿어온 우리에게 큰 당혹감을 안겨줬다. 애당초 곡해와 논리적 비약으로 논문을 소개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그 내용에 콧방귀를 뀐 건 이념이라는 진중하고 복잡한 언어를 한낱 알통으로 이해하려는 발칙함 때문이었다. 정치의 영역에서 이성적 판단만을 긍정하고 허락하는 이상, 논문의 내용은 결코 납득될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인 개인’으로 상정하며 본능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바람직하게 여겨왔다. 알통이 큰 동물이 고집스레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고 싶어하고, 그 불안감에 따라 정치 태도를 형성한다는 것은 외면해야 할 발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감정적이다. 열렬히 좋아하는 연인 앞에서 모든 이성 판단을 제쳐버린 경험은 살아가며 한 번쯤 있을 테다. 냉철한 이성을 갖춘 듯한 사람도 실은 이성의 단어로써 감정을 설명하는 사후 작업을 잘하는 사람이다. 좋으면 다가가고, 싫으면 멀리한다. 이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혼자 또는 무리에서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인간의 내생적 본능이다. 감정과 직관은 기민한 판단의 도구였고, 위험 회피의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나의 집단과 정체성을 공격하는 후보 정당은 얄밉고 싫다. 당장의 불안을 줄여주고 오롯한 도덕 감정을 불러오는 존재는 가까이 두고 싶다. 알통의 크기만큼 감정이 피어나는 기작은 저마다 달라도, 때마다의 호불호는 우리의 결정을 추동한다.

정치적 선택이 이성적이지 않다 한들, 유권자를 타박할 건 없다. 오히려 이성적이지 않기에 자연스럽다. 정치 행위자가 정책 패키지를 꾸리는 능력 외에도, 그를 감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감수성을 갖춰야 하는 이유다. 방향성이 있다면, 독선의 목소리로 이해를 요청하기에 앞서 곳곳에 공감 지표를 마련해야 한다. 물론 느리고, 답답하며, 자칫 위험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경쟁이 미덕이 되는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분노들이 부딪히는 오늘날, 결국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감정에 있다. 한없이 이성적이어야 할 것은 법과 제도지 정치 행위 자체가 아니다. 정치에서 감정이 용인될 때, 갈등은 반영되고 시나브로 해소된다. 또 그간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정치와 멀어졌던 유권자를 불러올 수 있다. 민주주의는 논리학이 아니다. 정치에 감정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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