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현 학술부장

시간은 사람을 참 유약하게 한다. 당신도 그랬다. 당신껜 오랜 친구가 있었다. 내가 그분의 이름과 나이, 그의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의 이름과 나이도 알 만큼. 그런 그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당신은 해포가 지나도록 수면제 없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백사장의 모래와 같아서, 아무리 깊은 상처도 어느새 무늬 없는 회색 물결 아래에 덮여 그 피상을 감추기 마련이다. 당신은 계속 강인한 척을 하셨고 내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엔 제법 건강해지셔서 네 앞엔 이제 행복한 일만 있을 거라며 기뻐하며 말할 수 있게 됐다. 아마도 그건 당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 듯도 했다.

슬프게도 그 말은 나나 당신에게나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채 한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시간은 그대 어머니의 생명을 고통스럽게 빼앗아 갔다. 반년이 넘도록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지만 결국 치료를 포기하고 본가로 내려와야 했고 당신은 말기 암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을 찾아 온 도시를 뒤져야 했다. 그리고 이제 장례식을 치러야 할 때, 당신은 이번에는 강한 척하지 못했다. 입관 전, 차가운 조명을 맞으며 유리 맞은편에 누워 계시던 나의 할머니 앞에서, 당신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눈물 흘릴 뿐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죽음의 모습을 직접 보았고 그 공간 속에서 죽음은 비참하다고, 삶의 결말이 이리도 비참하다면 인생은 결국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은 순간이고 시간이 흐르면 잊고 괜찮아지겠지만 심한 아픔은 쉽게 덧나는 흉터를 마음에 영원히 새겨 놓는다. 시간은 잔인하게도 흉터에 흉터를 더하고 사람은 한없이 서글프고 유약해져만 간다. 종래엔 한 인간의 삶이 비극적인 마무리를 맺는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래사장 위 어린아이는 모래를 꼭 쥐어보려 한다. 하지만 모래를 두 손 가득 담아 새지 않게 꽉 쥐어도 모래는 어느새 작은 틈으로 조금씩 흘러나와, 나중에 다시 손을 폈을 땐 지저분한 알갱이들만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 뿐이다.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손을 털어내야 하고, 손바닥엔 까슬까슬함이, 입속에는 모래가 들어간 탓에 텁텁한 느낌밖에 남지 않는다.

삶이란 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무얼 위해 살아야 할까. 한때는 글과 예술을 바라보며 살았다. 작가는 비록 아픔 속에 풍화돼 없어져 버려도 그가 했던 생각과 감정, 이 느낌은 작품 속에 영원히 남아, 후의 사람들에게 연주되며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그러나 그런다고 내가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나의 세상 위에 앉아 공들여서 시간의 탑을 쌓아도, 나의 세상이 끝나버리면 내가 남긴 흔적은 나와 영원히 격리된다. 이 때문에 모든 성(成)은 개인에게 죽음과 함께 무늬 없는 백지로 부서지는 모래성(城)과 다르지 않다.

이런 형이상학적 물음에는 신경 끄고 일단 오늘을 잘 살아야 함을 논하는 말은 많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비록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빛나라. 결코 그대 슬퍼하지 말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마지막을 청할 테니” 그러나 그런 말들에 기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한들 삶이 남긴 상처가 낫지는 않을 것 같다. 난 평생, 삶이 무의미한 모래로 부서져 버릴 때까지 왜 이런 고통을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지 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질문에 답도 못하는 유약한 내가 오늘을 꾸역꾸역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까닭은 단지, 죽음은 너무 슬프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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