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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21세기를 만나다 ①취재 | 창극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 황지연 기자
  • 승인 2018.11.04 16:54
  • 수정 2018.11.0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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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고유의 음악극 ‘창극’이 ‘한국의 오페라’로 불리며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같은 유럽 무대에서 큰 반응을 얻었다. 창극의 동시대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대적 관점에서 판소리 다섯 마당을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서양 희곡으로까지 소재를 넓히고, 국내외 유명 예술가와의 협업을 마다하지 않았던 국립창극단의 노력을 세계가 알아보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난 몇 년간 대중화, 현대화, 국제화에 힘써왔던 창극이 드디어 변곡점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고전? 고유!

창극은 판소리를 모체로 한 우리나라 고유 연극이다. 이 새로운 예술 형태가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100년 남짓 됐다. 1900년대 초 우리나라에 서양식 극장이 들어서면서 그동안 판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공연하게 된 것이다.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유영대 교수(고려대 국어국문학과)는 “야외나 사랑방에서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부르던 판소리가 실내 공연장으로 들어오기엔 무대가 다소 허전한 부분이 있었다”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반주가 더해져 풍성하고 화려한 무대를 꾸려가게 간 것이 창극의 시초”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일본의 가부키가 500여 년, 중국의 경극이 2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데에 비해 우리 창극의 역사는 짧은 편”이라며 “창극은 전통극이 아닌 근대극”이라고 설명했다.

창극은 고전이기보단 고유에 가까운 공연 예술 양식이다. 판소리로부터 파생됐지만 창극은 판소리와는 엄연히 다른 예술 장르다. 판소리에선 창자가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창극에선 여러 명의 배우가 나와 소리를 하며 하나의 ‘무대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유 교수는 “판소리는 소리꾼의 성격이 배우와 이야기꾼 사이에서 모호한 서사 장르에 가까운 연희지만, 창극은 판소리를 음악으로 사용하는 극양식”이라며 “영어로 ‘판소리 오페라’나 ‘판소리 뮤지컬’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라고 이야기했다. 연극평론가 김향 씨는 “창극은 판소리엔 없었던 시각적 효과가 강한 하나의 ‘음악 연극’”이라며 “판소리와는 달리 장르 자체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성장해온 예술”이라고 말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러나 창극은 점차 설 곳을 잃어갔다. 일본으로부터 신파극이 소개되면서 기존에 사랑받던 우리 연극이 ‘구파’로 여겨져 점차 서양식 근대극에 그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유영대 교수는 “국권 침탈 이후 일본식 문화가 우리에게 강요됐다”며 “일본 문화가 확장되면서 우리나라의 배우들마저 신파극처럼 창을 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더군다나 일제 통치하에서 우리 고유의 연극이 계속해서 상연되는 것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해방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유입된 서양의 것은 좋고 우리 고유의 것은 지루하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게다가 영화와 TV가 흥행하면서 창극은 점점 역사의 뒤로 밀리게 됐다. 이에 대해 유 교수는 “1960년대 민족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우리 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식 속에서 1962년 국립창극단이 창단된 것”이라며 “다만 이 과정에서 창극이 ‘보존돼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창극이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다. 심지어는 창극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다. 더 이상 ‘충’, ‘효’, ‘예’와 같은 전통적 교훈과 계몽적 서사 전개는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창극의 서사가 따분하다는 시선에 대해 김향 평론가는 “여러 개의 이야기를 혼동해서 기억하거나 한 가지 주제 의식으로만 이야기를 규정해버리는 등 고전 서사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많다”며 “고전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판소리 다섯 마당이란 레퍼토리를 비롯해 창극은 시대적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체적 문화 내에서 스토리텔링이 충분히 가능한 장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창극의 음악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오해도 많다. 발성법과 가락 자체가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에 난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재길 교수(국민대 국어국문학과)는 “사실 어떤 음악도 명확하게 들려서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 익숙하기 때문에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판소리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게 계속해서 그들을 객석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창극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증명된 음악, 잠재된 서사

◇소리를 품은 창극=창극과 판소리는 각기 다른 예술이면서도 서로에 잘 녹아들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진다. 판소리가 서사성이 짙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유영대 교수는 “판소리는 연극으로 풀어내기에 아주 좋은 형식을 갖추고 있다”며 “‘이 도령이 말하기를’ ‘춘향이가 말하기를’과 같은 부분을 제하면 그 자체로 훌륭한 대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진주 강사(충북대 국어국문학과)는 판소리 음악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판소리는 서사적 표현이 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며 “따라서 판소리를 창극으로 가져올 때 판소리의 강점을 살려 서사가 강한 극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판소리의 음악적 우수함 자체가 창극의 큰 강점이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서재길 교수는 “판소리는 인간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이용한다”며 “블루스에서 랩까지 아우를 수 있는 속도 감각과 음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밀도 높은 가락은 판소리만이 가진 힘”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창극원 박종철 대표는 “판소리는 듣자마자 판소리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강한 개성을 가진 음악”이라며 “정체성이 뚜렷하다는 것만으로도 소리는 예술적 자산”이라고 말했다.

◇어떤 이야기든 창극이 될 수 있다=하나의 극예술 양식인 창극은 다양한 시각과 이야깃거리에 열려 있다. 처음부터 ‘무대’라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탄생해 자체로 확장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극이 다룰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실제로 최근 10여 년간 국립창극단은 이런 시도들을 꾸준히 해왔다. 스파르타와 트로이의 전쟁에 대한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트로이의 여인들’, 전통적 성 인식에서 벗어나 ‘변강쇠전’을 ‘옹녀’라는 여성 주인공의 시점에서 바라본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프랑스 구전 동화 ‘빨간 망토’를 현대적인 창극으로 풀어낸 ‘소녀가’ 등이 대표적이다. 국립창극단 김성녀 예술 감독은 “창극이 어렵다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다”며 “동시대성을 확보해 관객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야 창극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창극이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기 위해선 시대에 맞춰 변화해 나가야 한다. 유영대 교수는 “‘심청전’의 심청이를 효녀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조명하는 등 우리 고전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소리가 낯선 관객들을 위해 자막을 활용하는 것도 변화의 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서재길 교수 또한 “대중 예술은 시대 맞춰 변모해야 한다”며 “계속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노력을 통해 작품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박물관에 전시하듯 창극을 ‘모셔 놓으려고만’ 한다면 이는 창극이 경쟁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성장의 변곡점에서

콘텐츠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관객의 저변을 확대해 나갈 방법이다. 물론 최근 들어 창극의 관객층이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창극 무대 객석엔 젊은 귀명창이 부족하다. 김향 연극평론가는 “창극이 더욱 성장하기 위해선 귀명창을 길러낼 수 있는 여건 자체가 조성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김성녀 예술 감독은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어진 대중적인 창극 공연들을 접한 관객들이 소리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가면서 판소리에도 관심을 두게 돼 귀명창이 되는 것”이라며 “처음부터 본격적인 소리를 들려주려 한다면 관객들은 이를 다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이진주 강사 또한 “콘텐츠가 다양해야 기존 공연예술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나 특정 서사 장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객석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며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전통적인 작품, 현대적인 작품 할 것 없이 고루 존재하는 것이 창극이 살아남게 되는 길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전문 인력의 확충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한국창극원 박종철 대표는 “적극적인 태도로 창극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창극계가 위축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더 질 좋은 작품이 많이 창작되기 위해선 소리를 바탕으로 ‘극’ 자체에 대한 이해가 깊은 창극 전문 배우와 창작진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주로 연극·뮤지컬 연출을 맡아오던 고선웅 씨가 연출과 극본을 맡았던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계속되는 매진 행렬 속에서 창극 최초로 차범석 희곡상 뮤지컬 극본상을 받아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인력이 많아져야 여러 작품을 동시에 상연할 수 있게 된다. 김성녀 예술 감독은 “대극장, 소극장, 지방 공연, 해외 초청 공연 등의 일정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어야 관객들에게 더 다양한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라며 “현실적으로 국립창극단 기준에서 현재 단원의 두 배수가 더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창극은 이제 막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런 만큼 창극은 정체성을 지키면서 기틀을 다져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부분 전문가는 창극의 정체성은 판소리에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판소리가 다른 공연예술과 창극을 구별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박종철 대표는 “판소리 열두 마당이 기존에 가진 가락을 깨뜨려선 안 된다”며 “지나치게 대중의 입맛을 좇다 보면 자칫 창극이 길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유영대 교수는 “창극에 사용되는 국악은 충실히 판소리 어법을 따라야 한다”며 “작품 속에서 다른 음악 장르가 활용되더라도 그저 음악극이라는 이유만으로 판소리가 아닌 국악이 소리와 혼동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와 소리를 창작하는 작창가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다”고 부연했다.

창극은 이미 ‘창조적인 극’이다. 판소리라는 전통의 힘을 갖고 오늘날의 시대를 담아 내일을 향해 더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이 예술 양식은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서 큰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변곡점’에 들어선 것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향후 창극이 어떻게 새 지평을 넓혀갈 수 있을지는 시대와 함께 살아남으려는 창극계의 노력, 색안경 끼지 않은 대중의 따뜻한 시선, 그리고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을 수 있게 해줄’ 사회의 적극적 지원에 달려 있다.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황지연 기자  ellie0519@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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