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이 위기란 얘기가 많다. 실제로 위기다. 직무대리가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고 짧게 겪는 홍역이어야 할 총장선출과정은 대학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밖의 사정도 여의치 않다. 서울대에 대한 애증을 넘어 대학 자체의 가치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자주 접한다. 예산 지원은 물론 우리가 누리는 최고 대학으로서의 지위는 인정에 기반해 있다. 그 인정이 흔들리고 있다.

항변할 이유가 많지 않다는 데 구성원으로서의 슬픔이 있다. 물론 항변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엄청나게 뛰어난 구성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수업할 때마다 학생들의 탁월함에 탄복한다. 그러나 외부의 흔들리는 눈빛은 이에 대한 의구심이 아니다.

관악의 그대들은 얼마나 관악 밖의 우리를 생각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밖의 우리에 대한 생각도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묻고 있다. 이 질문 앞에선 자신감이 조금 떨어진다. 우리 구성원 각자 서로 살기 바빠 자신만을 돌보며 자신만의 안위를 챙기고 있단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학교를 이끌 지도자도 이런대세를 무시하지 못하니 총장선출과정 자체가 조금은 불편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신문』 1972호를 완독했다. 그리고 희망을 봤다. 과거의 대학신문 기사들에서 대학 외부에 대한 조금 과장된 관심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감당할 수 있는, 애정 어린 관심이 돋보였다. 남의 문제라 할 수 없는 디지털 성범죄와 상가 건물 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시의적절하게 다룸으로써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슬픔에 애정을 표현했다. 묘한 예정 조화의 느낌마저 들었는데, ‘저자를 만나다’에서 슬픔 역시 배워야 한다는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주장을 이 기사들이 실행에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아픔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임차인의 슬픔을 내가 새롭게 더 배운 계기가 됐다.

보다 큰 희망은 구성원 서로서로에 대한 관심에서 느꼈다. 가까운 주변을 살피지 않는 자가 밖을 살피는 경우는 드물다. 2면의 관악사 최고참 청소노동자 인터뷰 기사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학교가 그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의지해야 할 분의 노고를 드러내줬다. 재수강 열풍에 시달리는 학생들에 대한 기사 역시 의도는 좋았다. 다만 보다 깊은 분석이 조금 아쉬웠다.

가장 큰 희망은 다양한 구성원들의 의견 개진에서 봤다. ‘맥박’ ‘독자 칼럼’ ‘자하연’ ‘취재수첩’ ‘관악시평’에서 우리 구성원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반성하고 대학이 새롭게 갈 길을 생각하는지 잘 드러났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우리가 길러내고 있는 인재들이 가져야 할 참된 모습, 진정한 교양 교육의 방향, 위험한 편견의 해악에 대한 반성 등은 자기 자신의 삶에만 몰두해 남을 잊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결국 『대학신문』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 셈이니 약간은 어색하다. 그러나 칭찬할 일이 드문 세상이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젠 눈을 들어 관악을 보라고 할 시대가 아니다. 관악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피고 있음을 보여줘야 할 시대다. 밖을 제대로 보기 위해 서로서로 챙기고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궤적으로 『대학신문』은 우리 대학의 작은 희망이다.

이석재 교수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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