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연 기자

문화부

두 면에 3개 이상의 기획 기사를 싣기로 결정한 날, 신문사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툭, 툭 헛웃음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입사 후 내가 배운 ‘기획 기사’는 기사의 문단과 문단 사이, 꼭지와 꼭지 사이가 촘촘하게 연결돼 긴 호흡과 심도 있는 시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쪼개 버렸다. 데스크와 주간단은 이를 두고 오히려 더 좋은 기획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기획다운 기획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사실 얼마든지 메인 기사만으로도 두 면 기획을 구성할 수 있었다. 늘 해오던 대로,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한 기사의 전개 흐름을 따르면 됐다. 현황을 짚고, 문제점과 문제 원인을 살펴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이때 유독 문화부 기사가 마주하는 어려움은 한결같다. 바로 ‘해결 방안’ 부분이다. 의식적 차원에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제도적 차원에서 정부의 지원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고인 물 같은 결론이었다. 이 결론은 항상 같은 반박을 야기한다.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강요할 수 있는가? 정부가 왜 돈도 안 될 것 같은 일에 제도적·경제적 지원을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이 끔찍이도 싫었다. 사람들을 억지로 객석에 끌어 앉힐 순 없으니 최소한 ‘볼 만한’ 공연을 구성해나가야 하는데, 정작 이런 볼 만한 공연은 돈이 없으면 만들기 어렵다. 그런데 관객 수를 늘리고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이 콘텐츠가 충분히 인기가 많다는 것이 먼저 증명돼야 한다. 그럼 비인기 콘텐츠들은 그것이 갖고 있는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인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게 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대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내 각오는 ‘이걸로 평생 단 한 푼 벌지 못하더라도’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했다. 사회가 왜 도와야 하냐고? 우린 보통 죽어가는 사람을 왜 구해야 하냐고 묻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점과 그에 따른 해결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과감히 없앴다. 대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다. 현재 창극이 처한 상황을 살피는 데 그치지 말고 기존의 인식을 뒤집기를 택하자. 창극이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아닌 잠재력에서 찾자.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나열하지 말고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지 논하자. 하지만 이것도 다 기사가 읽혀야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재밌어할 만한, 그리고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인터뷰와 리뷰 기사를 더하자.

아, 그래도 불안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 면을 산산조각 내버린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은 취재를 하면서 생겼다. 창극 관련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며 취재 요청을 드리면 모두 흔쾌히 수락하며 ‘우린 이런 기사가 필요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관되게 이야기했다. ‘본질과 정체성을 놓치지 않는다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취재를 끝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사의 본질을 잊고 있었다. 기사 쓰기 귀찮다며 노래를 부르다가도 막상 취재하기 시작하면 모든 걸 잊고 기사에 열중하던 그 이유. 누군가, 어디선가 기자의 목소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 사람 있어요’라고 외치면서. 그래, 그 순간을 포착했다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