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탄생 100주년

냉전 시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러시아 문학 작품 중 하나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들 수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묘사되는 수용소의 현실은 철의 장막 너머의 독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련은 시민들을 가혹한 수용소에 보내는 폭압적인 체제로 인식됐고, 솔제니친은 대표적인 반체제 작가이자 소련의 1인 야당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도 솔제니친의 작품들은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반공 문학으로 수용됐다. 그러나 솔제니친이 단순히 반공만을 추구한 작가라면 그의 작품은 냉전의 종식 뒤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대학신문』에서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암 병동』이라는 솔제니친의 두 대표작을 통해 단순한 반공 문학의 틀을 걷어내고 솔제니친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고자 한다. 각각 수용소와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두 작품은 소련 체제를 고발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던진다. 솔제니친이 그려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또, 솔제니친의 문학은 현재의 러시아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군인, 죄수, 그리고 환자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암 병동』은 둘 다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로 볼 수 있다. 학생, 군인, 죄수, 유형수, 암 환자, 작가, 망명자. 솔제니친의 경력은 그가 거쳐온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솔제니친이 스탈린을 조롱한 죄목으로 체포돼 수용소 생활을 했을 때의 경험을 반영한다. 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수용소 생활을 하던 솔제니친의 페르소나다. 수용소에서 석방된 솔제니친은 카자흐스탄 남부의 코크테레크에 유배됐다. 코크테레크에서 암이 악화된 솔제니친은 타슈켄트의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솔제니친이 병원서 경험한 일들은 『암 병동』의 주인공인 유형수 코스토글로토프를 통해 드러난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와 코스토글로토프는 솔제니친이 거친 삶의 단계가 인물로 투영된 것이다.

슈호프와 코스토글로토프가 살아가는 공간인 수용소와 암 병동은 죽음에 맞닿아 있다. 수용소는 생존이 어려운 가혹한 조건을 재소자들에게 강요한다. 재소자들은 극한의 추위와 싸우며 종일 중노동에 시달린다. 죽과 빵으로 구성된 형편없는 식사는 재소자들의 건강 유지에 충분치 않다. 간수들의 가혹한 대우 역시 재소자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한편 암 병동은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환자들은 병실에 둘러앉아 죽음을 기다린다. 병이 완화돼 퇴원하는 환자는 극소수다. 가망이 없는 환자들은 느닷없이 퇴원하라는 통보를 받고 좋아한다. 기쁘게 달려나간 이들은 곧이어 시내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수용소와 암 병동의 또 다른 공통점은 제복이다. 수용소의 죄수복과 암 병동의 환자복은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체제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도, 위풍당당한 해군 중령도, 순박한 농부도 죄수복을 입으면 죄수라는 밋밋한 회색 존재로 통일된다. 환자복도 마찬가지다. 환자들은 모두에게 맞도록 헐렁하게 만들어진 환자복을 입고 무기력과 공포에 구속된다. 이는 스탈린 체제에서 권력을 누리던 고위 공산당원 루사노프도 피해갈 수 없다. 환자복을 입고 암 병동에 입원한 순간 루사노프는 “하나같이 몸에 맞지도 않고 색이 누렇게 바랜 데다 해져서 군데군데 기웠거나 구멍이 숭숭 뚫린 분홍색 줄무늬 환자복을 입은 저들”의 하나가 된다. 체제는 제복을 통해 한때 개성적이었던 개인에게 복종, 수용, 무기력을 덧씌운다.

제복이 가두지 못한 자유

천편일률적인 환자복과 죄수복은 인간의 외형을 덧칠할 수는 있어도 내면까지 지워버리지는 못한다. 역설적으로, 외형적으로 모두 똑같아지고 죽음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자아와 대면한다. 『암 병동』에서 인용된 푸쉬킨의 시*에 따라 폭군, 배신자, 죄수로 분류된 세 종류의 사람들은 각각 공포, 회한, 자유와 마주한다. ‘폭군’ 루사노프는 면회를 온 가족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재회한다. 자신의 고발로 수용소로 끌려간 동료가 석방됐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다. 대숙청에서 억울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을 방관했던 ‘배신자’ 술루빈은 자신이 사는 내내 겁에 질려 거짓말을 해왔다며 자신의 인생을 비판한다.

전쟁터에서 수용소로, 수용소에서 유형지로 가축처럼 끌려다니던 삶을 살던 ‘죄수’ 코스토글로토프는 죽음 앞에서 자유를 발견한다. 코스토글로토프는 환자 중 유일하게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병을 극복해보려는 환자다. 그는 몰래 의학 서적을 빌려 탐독하고, 의사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는 대신 진단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 원리를 이해하려 애쓴다. 나아가 코스토글로토프는 차가 버섯이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을 다른 환자들에게 전하며 일장연설을 한다. 군인, 수용소 재소자, 유형수, 환자로서 항상 권위에 복종하고, 듣기만을 강요당했던 코스토글로토프는 열정적으로 좌중을 주도하며 자신이 다시 당당해졌고, 삶을 되찾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코스토글로토프와 같은 사람들을 탄압하던 계층을 대표하는 루사노프도 부랴부랴 연필을 빌려 코스토글로토프의 말을 열성적으로 받아 적는다.

제복 안에서 싹튼 자유는 자라나서 제복을 거부한다. 사람들은 제복을 각자의 방식으로 입으면서 자유를 표출한다. 코스토글로토프는 발꿈치까지 내려오는 여성 환자용 회색 가운을 걸치고 군용 혁대를 찬 채 산책하러 간다. 그는 산책 중에 의사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며 자유를 만끽한다. 병원보다 강압적인 수용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해군 중령 출신 재소자인 부이노프스키는 죄수복 안에 사복을 입었는지 검사하는 교도관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하며 “당신들도 엄연한 공산주의자란 말이오!”라 일갈한다. 체제는 사람을 가두지만 사람의 자유를 가두지는 못하는 것이다.

강추위 속에서 싹트는 연대

수용소와 암 병동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다. 인간은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묘사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비참하고 짧다. 수용소와 암 병동은 홉스의 자연 상태가 구현되기에 적당한 공간이다. 죽음 앞에서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이기심을 내비치며, 빵 한 조각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투쟁할 것으로 보인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많은 인물이 죽 한 그릇, 담배 한 개비와 같은 작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배신하고 정제되지 않은 이기심을 표출한다. 수용소 생활을 3개월밖에 하지 않은 부이노프스키 중령조차도 먼저 식사하던 재소자들에게 죽을 다 먹었으면 빨리 일어나라고 호통치고는, 정작 자신은 죽을 다 먹고도 일어나지 않는다. 식당의 따뜻함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것이다. 이런 사정은 ‘죄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다른 죄수다.’라는 슈호프의 생각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솔제니친은 이런 환경에서도 생겨나 유지되는 연대에 눈길을 돌린다. 수용소에서도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하는 야수로 변하지는 않는다. 슈호프가 소속된 104 작업반 사람들은 동료들과 온정과 신뢰를 쌓고, 연대를 구축한다. 복장 검사에서 반항한 죄로 결국 영창에 가게 된 부이노프스키 중령을 지켜주기 위해 작업반장 추린은 간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부이노프스키의 죄수 번호를 모른다고 하면서 지연 작전을 편다. 부이노프스키 중령이 잡혀가게 되자 영화감독 출신 재소자인 체자리는 수용소 안에서 귀한 취급을 받는 담배 두 개비를 건네준다. 몇몇은 “용기를 내라! 굴하지 말라!”라는 말로 중령을 격려한다.

무엇보다 죽음을 상징하는 공간인 암 병동에서도 사람들의 연대와 삶은 계속된다. 병원은 보통 따뜻하고 전통적인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이다. 항상 소독약 냄새가 풍기고, 벽은 온통 흰색이고, 식단은 통제되고, 옷은 모조리 환자복이다. 그러나 여자 병동의 환자인 스쵸파 아줌마는 소련의 암 병동에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을 이어간다. 스쵸파 아줌마는 어린 환자인 죠마에게 육식기* 동안에 먹으라며 따뜻하게 고기만두를 권한다. 그러면서 스쵸파 아줌마는 죠마에게 암에 걸린 것도 신의 뜻이라고 말해준다. 소련 체제에서 철저하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교육을 받은 죠마조차도 옛날 명절을 따지고, 하느님을 믿으며, 웃음을 잃지 않고, 고기만두를 나눠주는 스쵸파 아줌마를 반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기만두를 매개로 하는 연대가 죽음뿐만 아니라 전체주의까지도 넘어선 것이다.

솔제니친이 꿈꾼 미래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암 병동』을 통해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와 연대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소련 체제는 솔제니친의 작품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1974년 솔제니친을 추방했다.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솔제니친은 소련붕괴 이후인 1994년에서야 조국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솔제니친은 무엇을 발견했을까? 인간의 자유와 연대를 중시한 솔제니친에게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집권한 1990년대 러시아의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소수의 올리가르히*들이 경제를 장악해서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은 솔제니친이 그린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본주의와 서구 문화의 급격한 유입으로 파편화된 러시아인들 역시 솔제니친이 그린 연대에 부합하지 않았다. 1998년 솔제니친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상을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 솔제니친이 푸틴 대통령에게 상을 받고 호의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세계에 충격을 줬다. 러시아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이어나가는 푸틴에게 솔제니친이 상을 받은 것은 반체제 작가로서 쌓아 올린 솔제니친의 경력과 모순되는 것으로 비쳤다. 솔제니친은 작품에서 보여준 두 가치 중에서 자유보다는 연대, 특히 민족의 연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민족에 대한 강조는 솔제니친의 작품에서 종종 눈에 띈다. 이런 면에서 반체제적이었던 솔제니친이 권위주의와 민족주의에 굴복해 변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한 스쵸파 아줌마가 대표적이다. 소련 체제 성립 이전의 유산인 러시아 정교회를 믿고, 전통적인 러시아 시골 아낙처럼 고기만두를 나눠주는 스쵸파 아줌마는 비인간적인 소련 체제와 대비돼 따뜻한 인물로 그려진다. 교조적인 공산주의자인 루사노프조차도 “진짜 러시아인답게 최근에 생긴 공포감이나 의사들의 금기, 금주 맹세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온기를 느껴보고 싶어” 동료 환자인 찰르이와 보드카를 나눠 마신다. 공산주의 체제의 권위와 규칙을 상징하는 그도 러시아 민족의 일원답게 보드카를 마시며 다른 환자와 연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솔제니친의 작품을 이해하는 세 키워드는 비판, 자유, 연대다. 소련 이후의 러시아를 바라보면서 솔제니친은 연대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솔제니친을 반공, 반체제 작가로만 조망해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점들이다. 냉전이 끝나고도 솔제니친의 문학이 주목과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서 그려진 인간과 민족에 대한 관점 때문이다. 솔제니친의 여러 주제에 대한 고른 이해만이 그의 작품 세계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푸쉬킨의 시: 암울한 우리 시대에는, 어디를 가든 인간은, 폭군 아니면 배신자 그리고 죄수

*육식기: 러시아 정교에서 규정하는, 신자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간

*올리가르히: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 나타난 과두 재벌로, 러시아의 경제를 장악했다.

암병동 1, 2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영의 옮김
448쪽, 424쪽
14,000원, 13,500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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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영의 옮김
224쪽
7,000원
민음사

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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