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엽 강사

경영학과

가을학기 ‘중급회계’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원래는 지난 봄 학기에 이어 관리회계 수업을 계속해서 가르칠 예정이었는데, 연구실 동료가 갑작스레 교수로 임용되는 경사스런 일로 인해 그의 빈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회계가 생소한 독자라면 중급회계나 관리회계나 같은 회계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의를 진행하는 내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중급회계는 나의 주 전공인 재무회계 영역에 속하는 과목인 반면 관리회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김연아 선수가 같은 스케이팅이라는 이유만으로 스피드 스케이팅을 가르치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피겨스케이팅을 가르치게 된 것과 비슷하달까? 김연아 선수의 팬이 들으면 분기탱천할 비유일 수는 있으나,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쾌재를 부를 만한 의미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났다.

이쯤되면 강좌 하나에 무슨 그런 큰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다. 특히, 나처럼 연구와 가정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기혼의 박사과정생이라면 강의엔 최소한의 시간을 들이는 것이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급회계는 내게 조금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나는 학부 졸업 후 10년 가까이 금융감독당국에서 일하다 뒤늦게 학업의 꿈을 위해 모교의 품으로 돌아온 늦깎이 학생이다. 감독당국에서의 10년을 돌이켜보면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가슴 한편에는 개인 자격의 공인회계사를 여럿 제재한 것이 내심 무거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다. 회계부정을 고의로 눈감아 준 경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일순간의 잘못된 회계적 판단(즉, 과실)에 대해서도 불가피하게 당사자의 경력에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을 만한 큰 불이익을 감내토록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심심찮게 접하곤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는 과연 저 상황에서 처벌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나를 따라다녔다. 공인회계사 시험도 합격하고 학교 수업도 나름 열심히 들었다고 자부하지만 졸업 당시의 나를 돌이켜 보면 마치 무슨 대역죄인 마냥 처벌받은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후배들에게 내가 현장에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제대로 전해줘 그런 안타까운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항상 가슴 저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중급회계라는 이름으로. 그러니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수업 첫 날 나의 원대한(?) 포부를 담은 강의목표와 커리큘럼을 소개하자 전체 수강인원 60명 중 20명에 가까운 인원이 일시에 등록을 취소했다. 그 후에도 수업시간에 교과서 수준을 넘어서는 복잡한 실무사례를 다루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파생금융상품 관련 논문과 기업회계기준서 개정초안을 함께 요약·분석하는 짐짓 도전적인 과제물을 요구한 결과 학기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은 겨우 30명 남짓이 힘겹게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아있는 학생의 경우 전체적으로 수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배움의 의지가 무척 강하다는 것이다. 점심 직후라 졸릴 만한데도 거의 모두가 최소한 생물학적으로는 눈을 뜨고 강단을 예의 주시할 뿐만 아니라 가끔 눈꺼풀의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 할 때면 강의실 뒤에 서서 수업을 듣기도 한다. 참으로 대견하고 기특하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한 교수님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연에서 ‘인(因)’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고, ‘연(緣)’은 사람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모교에서의 이번 중급회계 강의는 하늘이 맺어준 ‘인’처럼 우연찮은 기회에 찾아왔다. 남은 것은 이러한 ‘인’을 통해 만나게 된 나와 우리 학생들이 함께 멋진 ‘연’을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것이다. 앞으로도 결코 만만치 않을 두 번의 시험과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팀 과제가 있기에 얼마나 더 많은 학생이 중도 포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강의를 준비하는 나의 초심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학생 모두 끝까지 열심히 해서 다시 오지 않을 이 번 가을학기 중급회계 수업이 훗날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로서의 멋진 인연’으로 서로에게 추억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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