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호 교수

독어독문학과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쉽게 읽고, 쉽게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 수많은 글과 영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IPTV를 이용하면 소파에 앉아 리모컨 조작만으로 원하는 영화를 골라볼 수 있다. 보다 큰 스크린을 원한다면 서울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멀티플렉스 극장 중 하나를 찾아가면 된다. 굳이 서점에 가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에서 몇 번의 터치만으로 e-book을 구입해 바로 읽어볼 수도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기기는 글과 영상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해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글과 영상을 쉽고 빠르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접근 가능한 모든 것들을 다 읽고, 볼 수는 없다. 그 결과 무언가를 읽거나 보고자 할 때 ‘선택’은 우리에게 예전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할까? 영화나 도서의 흥행 성적이나 언론의 추천이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자나 관객의 평가가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정보들은 책이나 영화의 선택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선택의 실패를 줄이기 위한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다수의 취향과 견해에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우리와 비슷한 규모를 가진 독일의 영화시장과 비교해보면, 실제로 우리의 관객들이 다수의 견해에 따르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16년에 흥행실적 1위부터 10위까지의 영화를 본 관객의 수가 전체 관객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독일의 경우 26%였던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5%가 넘었다. 같은 해에 5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독일에서는 한 편도 없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0편이었다.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어쨌든 보는 사람에게 재미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이 보고 좋아하는 영화가 재미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 아닌가?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 이렇게도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5천만의 인구 중 천만 명이 보러 가는 영화가 일 년에 여러 편씩 나온다면, 우리의 취향은 지나치게 획일화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취향을 지나치게 괄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획일화되어 가는 취향은 우리 문화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책이나 영화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돼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자기 자신의 취향일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렇다면 자신의 취향을 찾아야 한다. 누구나 미적·예술적·문화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취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발견했더라도 가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고 있는 삶의 조건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 다르다. 따라서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미적 취향과 문화적 취향은 우리들이 살아온 과정만큼이나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를 찾지 못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만든 상업적 목적의 영화나 책이 주는 재미에만 만족한다면, 삶을 풍성하게 해줄 책도, 영화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취향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다수의 취향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자신의 취향을 관철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이성을 사용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듯, 자신의 문화적·예술적 취향을 따르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영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면 무작정 선택해 보는 것은 어떨까. 도서관을 찾아가 아무도 찾지 않는 서가의 한구석에서 무언가 마음을 끌 만한 책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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