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은

물리천문학부 석박사통합과정

내 연구실 책상 한 켠엔 오일파스텔이 있다. 오일파스텔보다는 크레파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더 친숙한데, 크레파스는 오일파스텔이라는 미술도구의 특정 상표명이다. 내가 가진 오일파스텔은 서양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오일파스텔이다. 더군다나,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은 피카소가 쓰던 오일파스텔이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시넬리에’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회사의 제품이란 것이다. 나는 종종 연구실에서 이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며 딴짓을 한다.

학부생 때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은 일이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나는 좀처럼 학교에 붙어있는 일이 없었다. 홍길동처럼 수업이 있을 때만 학교에 나타났다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오늘의 메뉴에 대해 친구와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도 큰 고민 없이 아직 학교가 좋으니 대학원에 가야겠다 싶었다. 다만, 메뉴 선정만큼은 '누구보다 신중하게!’가 신조였다면, 연구분야나 연구실만큼은 '누가 좀 골라주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했다. 이런 철없고 속 편한 내게 한 선배가 본인이 일하고 있는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의 인턴을 제안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휴학이 하고 싶었던 나는 여름 방학이 끝나고 바로 짐을 싸 독일로 떠났다.

돌아보면 〈다큐 3일〉의 독일 연구소 편을 3일이 아니라 세 달 동안 보고 온 듯하다. 연구소에는 연구원뿐만 아니라 아침 청소 후 홍차를 내려 마시는 청소부 참,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2시에 낚시를 하러 떠나는 기술자 게옥 등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구소 사람들은 실험장비 다루는 것부터 시작해 장보고 요리하는 것까지 가르쳐주었던 좋은 선생님이자 가족이었고, 시간이 날 때면 축제나 공연을 함께 즐겼던 친구기도 했다.

운 좋게 첫 인턴을 시작하게 돼서 내가 앞으로 연구하게 될 분야가 바라던 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구나 싶었다. 제대로 탐색을 하기엔 짧은 기간이었으니 운명처럼 나와 꼭 맞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교대상이 없기에 나에겐 그 분야가 최고였다. 어찌됐든 어딘가에 목적지를 정하고나니 가슴이 뛰었다. 독일에서 숨쉬는 것 빼곤 모든 게 다 서툴게 느껴져 작아지기도 많이 작아졌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걸어서 하루빨리 커다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틈만 나면 학교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나는 독일에 다녀온 이후로 학교에서 지나쳤던 많은 것들을 붙잡으려 노력했고 계획하지 않았던 일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엔 처음 만난 연인이든 처음 접했던 실험이든 첫 눈에 정착하려 했던 것들은 모두 달라져버렸다. 워낙 앞만 보는 일에 소질이 없었던지 나는 지금 그 때 정했던 분야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신경생물물리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그리고 무작정 붙잡고 버텼던 생활에서 몇 번 튕겨나오면서 지금은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길 바란다.

다시 크레파스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면 그래서 요즘은 한눈팔고 싶어질 때 부지런하게 실행에 옮긴다. 그림이 그리고 싶으면 그림을 그리고 운동하고 싶으면 운동하고자고 싶으면 잔다. 여기가 내 자리면 오래지 않아 돌아올 테고 새로운 에너지원이 돼줄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어딘가에 닿은 것도, 어딘가를 정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괜찮을 것 같다. 크고 화려한 불빛이 아니어도 어딘가 작은 불꽃이 필요한 곳에서 밀도 있게 나의 자리를 채우면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설사 가치 없는 일이라 해도 작은 불꽃은 귀엽다. 귀여운 것은 존재만으로 가치를 가지니 다 괜찮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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