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여름이 지나치게 길고 괴로웠던 탓인지 찬바람이 나면서부터 몇몇 사적인 모임에선 조금 이른 ‘연말 결산’이 빠지지 않는 주제다. 올 한해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들에 대해 서로 묻고, 목록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풍경이 종종 만들어지곤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사프디 형제(조슈아 사프디, 베니 사프디)의 〈굿타임〉(2017)을 떠올렸다. 2017년에 제작돼 올해 1월 국내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2018년을 돌아보는 리스트에 응당 그 이름을 올릴만하다. 끊임없이 변형되며 지속되는 표면으로 이루어진 〈굿타임〉은, 동시에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어온 거리와 도시에서 여전히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궁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굿타임〉을 보고서 그 불안한 활력과 긴장을 품은 질주와 충돌,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는 소란스러움과 분주함, 음악과 소리와 색채의 난장, 환영과 악몽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각의 매혹에 대해 말하지 않기란 어렵다.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 쉽게 요약될 수 있는 것으로, 가난한 어느 남자가 지적장애를 가진 동생과 은행을 털어 뉴욕을 벗어나려다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혀 결국 실패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건 빈곤과 형제애, 범죄와 도주로 비교적 간단히 서술되는 서사 자체보다 이 서사를 이루고 지탱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영화는 한 편의 도주극인 동시에 몇몇 분절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인물들의 형상과 공간의 구조, 얼굴이라는 기호와 색채가 변형과 반복을 거듭하면서 분절된 것처럼 보이는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익숙하게 출현한다. 혹은 그처럼 변형과 반복을 거듭하며 출현하는 요소들이 인물들 앞에 우연처럼 주어져 영화의 다음 행로를 결정하거나 영화 전체의 감각적 매혹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종종 어처구니없이 무언가 건너뛰는 것 같은 전개에 당황하기보다, 반복적으로 출현하며 우리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우선 말해보자.

영화가 시작하면 코니(로버트 패틴슨)가 어느 시설에 들이닥쳐 상담 중인 닉(베니 사프디)을 무작정 데리고 나온다. 뉴욕을 벗어나 동생과 함께 버지니아로 향하겠노라 선언하는 코니가 다음으로 선택한 장소는 은행이다. 그가 동생인 닉과 함께 가면을 뒤집어쓰고 은행을 턴 뒤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잠시 들떠있던 찰나 돈이 든 가방에서 색소탄이 터진다. 차 안과 화면을 가득 채운 붉은색 가루와 피어오르는 연기가 첫 번째 도주를 과격하게 멈춰 세운다. 이내 머리와 얼굴, 온몸에 붉은색 가루를 뒤집어쓴 형제의 모습이 보인다. 이 강렬한 붉은색은 말 그대로 영화에 묻은 듯이 이후 지속해서 출몰한다. 도주하다 잡힌 동생의 보석금을 내기 위해 찾아간 가게의 온통 붉게 빛나는 조명, 계속해서 인물들의 얼굴 위를 덮는 피, 밤거리에서 빛나는 온갖 종류의 네온사인과 경찰차의 불빛들, 영화 후반부의 주요한 공간으로 기능하는 놀이공원과 경비원의 집 조명 그리고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에 이르기까지, 붉은빛은 〈굿타임〉을 내내 장악한다. 이 반복은 마치 이곳에서 저곳으로 공간의 이동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와중에도 일종의 놀이공원 같은 폐쇄된 공간 안을 떠돌고 있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정신없이 진행된 은행 강탈과 도주 장면에서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다름 아닌 가면이다. 자신들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코니와 닉이 쓴 흑인의 얼굴을 한 가면은 곧 버려지지만, 얼굴을 가리고 오인하고 알아보는 행위는 사소하게 혹은 결정적으로 반복되며 영화의 이후 행로를 만들어나간다. 가면을 벗은 얼굴은 곧장 붉은 색소로 진하게 물들고, 감옥에 갇힌 닉의 얼굴은 다른 재소자들의 주먹에 짓이겨진다. 닉이 병원에 있음을 알아낸 코니가 병원에서 몰래 빼내온 남자의 얼굴은 온통 붕대로 감겨있어 식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는 닉이 아닌 전혀 엉뚱한 남자와의 갑작스러운 동행이다. 붕대를 잔뜩 감고 영화에 불현듯 출몰한 남자는 레이(버디 듀레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범죄자로, 가석방된 날 분란을 일으켜 얼굴의 반쪽이 뭉개지고 일그러진 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코니의 기이한 밤에 동참하게 된다. 조금 범위를 넓히면 머리카락을 밝게 염색하거나 남의 옷을 입는 행위들을 함께 언급해볼 수도 있다. 레이가 마약과 돈을 숨겼다는 놀이공원에서 코니는 야간 경비원의 얼굴을 부수듯이 때린 후 그의 모자와 옷을, 그러니까 그의 역할을 입은 채 경찰을 속이고 그의 집에 가기까지 한다. 얼굴에 관한 철학적 논의들을 덧붙여볼 수도 있겠지만, 얼굴과 복장의 어지러운 교체가 이 기묘한 도주극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연장한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처음에는 코니와 닉으로 시작된 두 명의 짝으로 이루어진 인물의 형상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닉이 붙잡히자 그 자리에 코니의 애인쯤으로 보이는 코리(제니퍼 제이슨 리), 잠시 몸을 의탁할 집을 내어준 노부인의 손녀인 크리스탈(탈리아 웹스터) 그리고 레이가 차례로 합류한 뒤 사라진다. 이들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또 다른 한 면으로 대변될법한 정신박약과 알코올중독 혹은 마약중독자의 초상을 느슨하게 구성한다. 물론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을 살필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일하지 않고 나이든 엄마의 신용카드에 기대 생활하거나, 마약을 파는 전 남자친구와의 의리를 지키며 천진하게 코니를 관찰하거나, 부서진 몸과 얼굴로 거칠고 수다스럽게 영화에 기묘한 활력을 부여하는 이들은 범죄영화의 훌륭한 조력자라기보다 코니의 동선이 놓일 세계의 얼굴을 구성하는 존재들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매 순간 주어지는 변형된 상황들로 도주를 연장하며 영화가 끊임없이 팽창하는 듯 보이지만 이 구조는 지극히 폐쇄적이기도 하다. 우선 코니의 행로가 결코 뉴욕을 벗어나지 못하며 그마저도 경찰에 의해 제압되며 막을 내린다는 점을 짚을 수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붉은빛이 불러일으키는 폐쇄적 감각도 앞서 언급한 대로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이 시각적으로 구조화되는 방식도 영화 전체의 구조와 조응하며 그러한 인상을 강화한다. 재미있게도 영화에는 코니와 닉의 집이 등장하지 않는데(스쳐 지나가는 뉴스 장면으로 추정해보건대 이들 형제는 현재 함께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대신 코리와 크리스탈, 놀이공원 야간 경비원의 집이 잠깐씩 등장한다. 이 공간들은 잘게 잘린 세부로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구석에 숨겨진 문, 그 문을 열고 몸을 욱여넣어야 비로소 등장하는 좁은 방들. 이를테면 노부인의 집에서 크리스탈의 방, 거실, 닉(으로 오인된 레이)을 눕힌 방이 집 전체에서 어떤 구조로 이어져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집은 그대로 있는데 카메라는 내부의 공간을 계속해서 쪼개며 무수히 많은 단면을 생성해낸다고 해야 할까. 이것이 〈굿타임〉에서 배어 나오는 무한하지만 폐쇄적인 감각과 연관되어 있고, 그 감각이 가장 극대화된 공간으로 놀이공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영화의 구조를 보다 직접 지시하는 사물은 다름 아닌 TV와 CCTV 화면이다. 경찰이 시민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영상에서 용의자가 된 코니 자신의 사진으로 바뀌는 채널들의 이동, 놀이공원 내부를 한데 모아 보여주는 폐쇄회로의 분할된 화면들, 이 화면에서 저 화면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 평면들이야말로 코니의 도주와 영화의 작동방식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혹은 코니가 그저 TV나 CCTV 화면과 같은 평면들 속을 떠돌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레이의 가석방 출소 후 무용담을 담은 플래시백의 갑작스러운 등장도 비슷하게 이해해 볼 법하다. 이 얼굴에서 저 얼굴로,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능청스럽게 건너가는 이와 같은 형식적 힘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어 영화는 채널을 바꾸듯 끊임없이 펼쳐진다. 그러다 사실은 폐쇄된 세계를 떠도는 것일 뿐임을 돌연 알아챘다는 듯 이 도주극은 레이의 추락과 함께 마무리된다. 다시 닉의 얼굴로 돌아온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행되는 ‘방 건너가기’ 게임은 이쪽 벽과 저쪽 벽을 왕복하는 단순한 몸짓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이다.

〈굿타임〉이 그런 폐쇄성을 비판하거나 도주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폐쇄된 세계 안에서의 끊임없는 변형과 반복이 영화의 주된 활력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굿타임〉은 외려 더 이상의 새로움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폐쇄적인 세계에서도 여전히 ‘영화’가 가능하다고 중얼거린다. 이에 대해선, 사프디 형제의 이전 작품인 〈Heaven Knows What〉(2014)의 한 장면을 잠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뉴욕에서의 미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도 소개된 적 있는 이 영화는 실제로 뉴욕의 홈리스 여성인 아리엘 홈즈가 쓴 기록을 원작으로 하는데, 그녀를 비롯한 뉴욕의 홈리스, 마약중독자, 〈굿타임〉에서 레이를 연기한 버디 듀레스 등이 출연한다. 거리에서의 사랑과 삶을 정신없이 따라가는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굿타임〉의 레이가 그렇듯 종종 과도한 말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중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요즘 ‘코스모스’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거기서 말하길 우리가 하는 사랑이나 증오, 온갖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들이 여기 이곳을 제외하고는 우주에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좋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인물들의 클로즈업을 오가며 숨 가쁘게 진행되는 〈굿타임〉의 카메라가 가끔 뉴욕 건물들의 외관이나 자동차가 달리는 거리를 멀찍이 떨어져서 보여줄 때가 있다. 이때만큼은 도시의 익명성이라거나 폐쇄성 같은 상투적인 표현이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도시와 거리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서 온종일 ‘아무도 모르는’(Heaven Knows What) 일들이 벌어진다. 〈굿타임〉은 그 작고 보이지 않는 운동들, 무한히 떠도는 몸짓들을 표면 위로 불러내 영화를 작동시키고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인물들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Heaven Knows What〉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뉴욕 바깥으로 나가려던 할리(아리엘 홈즈)는 어느새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 사이로 다시 돌아와 있다. 처연한 얼굴로 방을 떠도는 닉의 모습 위로 〈굿타임〉의 엔딩 크레딧이 오르며 이기 팝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노래,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거야.” 사랑과 증오, 욕망과 충동이 끝없이 모습을 바꾸며 떠도는 한, 사프디 형제의 영화가 멈추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손시내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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