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소설가 타계

작가 최인훈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은 지난여름 2018년 7월 23일이다. 호적상으로 보면 1936년 4월 13일 함경북도 회령 태생, 올해로 82세지만 본래 1934년생인 것을 월남해서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도록 부친께서 2년을 낮춰 신고했다고 한다.

일산에 명지병원이라고 있는데, 선생은 영면에 드시기 전에 줄곧 그곳에 계셨다. 일가족 모두가 월남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파동에 살았고 나중에 불광동, 갈현동을 거쳐 말년에는 고양시 일산의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했었다.

선생이 일산 계실 때 인터뷰를 하러 처음 찾아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2004년경이었던가. 그때는 최인훈 선생도, 박경리 선생도 모두 살아 계셨고, 지금 병석에 누워 있는 평론하시는 김윤식 선생도 활발하게 움직이실 때였다.* 이번에 최인훈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고 그와 호적상 동년배로 작가와 비평가로 깊은 교분을 맺은 김윤식 선생도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 계시다 하니 세월은 정말 무상하다 하겠다.

선생의 일산 아파트는 그때로써는 낯설다 싶게 일 층 현관문부터 벨을 누르게 해서 출입자를 확인하고서야 들여보내 주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일차 관문을 통과해서 8층 아파트 앞에 가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서도 한참을 있다 선생은 현관문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아파트는 넓지 않았고 차라리 소박하다 싶은 느낌이 강했다. 대학 시절부터 그의 『광장』과 『회색인』을 탐독했고, 비평가로서의 길도 『화두』를 다룬 글을 통해서 걷기 시작한 필자였다. 선생은 응당 그윽한 단독주택이나 아니면 같은 아파트라도 보다 장중한 인상을 주는 곳에 기거하고 계셔야 할 것 같았다. 거실에서 큰절을 드리고 비로소 마주 앉은 선생은 셔츠를 목 단추까지 단단히 채우고 계셨는데 그것은 마치 선생의 까다로운 성품을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선생은 그 인터뷰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을, 필자가 당신의 아들의 선생이기에 허락하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니까 인터뷰를 하기는 하지만 당신의 속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는 듯한, 마치 견고한 성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 같은 첫인상이었다.

이 폐쇄성과 견고함 속에 선생은 오연하기 짝이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상대하지 않는, 그래서 차라리 탈속적이라 해야 할, 어떤 ‘예외적’ 문학인으로서 줄곧 혼자만의 세계를 간직한 채 선생은 자기 안에 침잠해 있었다.

이것이 필자가 본 작가 최인훈의 인상이었고 이러한 면모는 2017년 2월 24일 그가 서울대 법대 명예 졸업장을 받고자 할 때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첫 인터뷰 이후 필자는 간간이 최인훈 선생의 자택을 찾았고 그 직접적 만남을 통해 이른바 월남 문학이라는 새로운 개념 구축을 위한 힌트들을 얻고자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잖던가.

1945년 8·15광복이 되자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최인훈 일가는 부친이 목재소를 운영하던 관계로 유산계급으로 분류돼 재산을 몰수당하고 원산으로 이주하게 된다. 원산에서의 소년기 체험은 이후 최인훈 문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작 『화두』는 원산중, 원산고 시절의 최인훈을 ‘등신대’의 형상 그대로 보여준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소년 최인훈, 그러나 담임선생이자 소년반 지도 선생이기도 했던 국어 선생은 어린아이의 작문 내용을 문제 삼아 자아비판이라는 무서운 사회주의 제도를 경험하게 한다. 그의 눈에 신생 공화국의 새 학교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회령의 학교보다 못나게 보인 것은 유산계급의 의식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 아니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른바 정통 마르크시즘에 있어 물신성 이론으로, 또 여기서 파생된 계급성, 당파성에 관한 이론으로 통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계급의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비밀’이 상품 화폐 경제의 외피에 가려진다 했다. 그 결과 잉여가치가 재화와 노동을 결합해 새로운 상품을 주조하는 자본계급의 능력으로 현상하는 것을 가리켜 자본주의적 물신성(Fetischismus)이라 했다. 나중에 이 이론은, 이러한 물신적 효과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으려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나타나는 담론으로 공고화된다.

소년 최인훈은 중학교를 졸업,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이 자아비판의 무거운 짐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이제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새로운 국어 선생님이 조명희의 단편소설 『낙동강』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박성운과 로사 두 사람의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새로운 농촌 공동체를 지향하는 운동가 박성운이 감옥에 끌려갔다 다 죽어서야 놓여나오고 애인의 죽음을 뒤로하고 또 다른 혁명의 길을 찾아 여자는 고향을 등진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 속에 든 사회주의는 몽상적인 아름다움을 띠고 있어 자아비판에 상처받은 학생 최인훈의 어린 마음을 위무해 준다.

최인훈이 원산고 1학년 학생 적에 6·25 전쟁이 났다. 북한군은 7월 졸업을 앞둔 원산고 3학년생 미래의 작가 이호철을 학도 의용군으로 소집,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 상태를 맞으면서 9·15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퇴각한다. 이 북한군을 추격, 북진한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전쟁 개입.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밀고 올라간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 철수라는 대규모 철수 작전을 통해서야 겨우 병력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2014) 덕분에 흥남 철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2월 15일부터 23일에 걸친 흥남 철수의 서막에 해당하는 것이 있었으니 12월 7일의 원산 철수가 그것이다. 이때 최인훈 일가족은 원산을 점령하고 있던 유엔군, 국군 쪽에 협력했던 관계로 모두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왔다. 같은 원산고 선배 이호철은 혈혈단신 부산에 낙지한다.

부산에 있다 목포에 가 고등학교에 다니며 북한에서 배운 러시아어 대신에 영어를 새로 익히며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최인훈, 그는 법학 공부는 그나마 법철학이 좋았고, 시인을 지망하는 문학도가 됐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문학이냐? 청년 최인훈을 끈질기게 괴롭힌 문제는 박성운과 로사의 아름다운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자아비판이라는 형식의 무서운 얼굴, 그 감시와 통제, 인간의 내면 파괴라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전쟁 중의 피난 임시수도 부산은 이승만 독재 체제의 무소불위 권력과, 이호철이 그의 대표작 『소시민』에서 그린 전시 자본주의의 새로운 퇴폐적 힘이 작용하는 부조리 공간이었다. 최인훈의 날카로운 이성과 몽상적인 시인적 감수성은 현실 체제를 긍정하고 그에 적응, 성공적인 세속적 삶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대학을 6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고 일설에 따르면 병장에게 구타를 당하고 우연히 본 통역장교 모집 공고문을 보고 응시하게 된다. 장교는 되었지만 정작 통역 근무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하고 대전 병기창에 근무하던 중 문제작 『광장』을 이어령 선생이 주관하던 잡지 「새벽」에 600매 분량으로 전재하면서 중요 작가로 부상하게 된다.

『광장』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60년 11월, 이 작품이 장편으로 개작돼 정향사라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출판사에서 나온 것은 1961년 2월, 그러니까 이 소설은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사이의 비좁은 공간 속에서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보는 행운을 누린 작품이었고, 이 작가적 행운이 해방 후 한국 현대 소설사를 위해서는 하나의 축복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이어령 선생이 이를 위한 산파 역할을 했던 것도 기억해 둬야 한다. 원래 최인훈 선생을 문단에 추천한 것은 작가 안수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이 그에 의해 추천을 받았고, 나중에 그가 타계했을 때, 최인훈 선생이 추모사를 읽었다. 이 최인훈을 이어령 선생은 무척 아꼈고, 이 신생 작가의 작품을 자신이 주재하던 잡지에 발굴, 한국 문학사의 경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광장』은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월북한 아버지를 둔 청년 이명준이 남과 북을 오간 후 전쟁 중 포로가 됐다 포로 교환 때 제3국을 선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쪽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북쪽으로 가지만 그 사회주의라는 것이 가상적 허위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이명준의 행로를 통해 그 자신이 월남민이었던 최인훈은 남쪽과 북쪽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현실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대신 사랑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가 되는, 또한 사회적 공론장으로서의 ‘광장’과 개인의 자유공간인 ‘밀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

이 청년작가 최인훈의 꿈은 이후 평생에 걸쳐 여러 형태로 변주되면서 끈질기게 탐색돼 나간다. 『회색인』(1963년 6월~1964년 6월)의 주인공 독고준은 자신의 혁명을 위해서는 “사랑과 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태풍』(1973)에서는 시야를 아시아로 넓혀 식민주의의 역사를 해체하고자 했다. 미국으로 가면서 쓴 일련의 희곡작품들을 통해서는 한국문화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확인코자 했으며,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재편된 세계체제 아래서 러시아까지 여행한 문명사적 경험을 담은 『화두』(1994)에서는 인류사에 있어 현대라는 것은 무엇인가, 20세기 현대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 쟁투를 벌인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최인훈 그 자신의, 저 북쪽에서 이 남쪽으로 종단해 온, 그 월경과 난민적 표랑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따져 묻고자 했다.

지난 7월 25일 아침에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필자는 최인훈 선생을 떠나보내 드리는 말씀을 읽을 수 있었다. 영결식을 주관한 것은 선생의 전집이 간행된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장례위원장께서 필자에게 귀한 순서를 마련해 주셨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최인훈 선생을 “고독한 항해사”라고 표현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에서 위대함을 발견한 선생은, 그러나 그 위대함을 반복할 수는 없으며, 그 자신의 새로운 문학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가면고』(1960)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선생은 이른바 제삼 세계의 작가로서 서양 문학과 자기 문학의 전통을 함께 섭렵해 새로운 단계의 문학을 주조하고자 했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단계를 넘어서는, 그 자신의 ‘세계문학’을 창조하고자 했다.

최인훈 선생이 그렇게 가시고, 김윤식 선생이 병석에서 인생의 마지막 국면을 보내고 계시고 이어령 선생 또한 지난 8월 18일에 한국외대에서 열린 현대문학회 학술대회에 오셔서 당신의 문학적 ‘유언’을 남기셨다. 거장들, 거인들의 문학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과연 이분들의 문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또는 문학을 통해 세계를 사유하는 방법을 얼마나, 어떻게 전유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문학적으로 살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갖든, 갖지 못하든, 분명한 것은 한국어의 문학은, 한국어를 통해 세계를 사유하고 기억하는 언어의 형식은 계속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문학은 아직 더 많은 진정한 작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방민호 교수
국어국문학과

*편집자 주

본 기고는 지난 9월 4일에 작성된 것으로서, 본문에 언급되는 김윤식 문학평론가는 지난달 25일, 82세 일기로 작고했다.

삽화: 권민주 기자 kmj474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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