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진료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바라보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농어촌과 도서 지역은 그야말로 의료 서비스의 불모지였다. 주민들의 위생 관념은 전무했고, 간단한 소독과 치료로 나을 상처를 처리하지 못해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지역 보건소까지도 가기 힘들 정도의 벽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기초적인 의료 혜택, 즉 ‘일차보건진료’를 제공하기 위해 생긴 시설이 바로 보건진료소였다. 의사 인력이 포화 상태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지금, 이 보건진료소들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대학신문』이 보건진료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짚어봤다.

지역 의료복지의 최전선에는 그들이 있었다

전국의 보건진료소는 현재 1,300여 개에 달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건진료소는 이름조차 생소한 기관이다. 법률에서 규정하는 보건진료소의 입지 조건 자체가 “의사가 배치돼 있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의사의 배치가 곤란할 것으로 예상”될 정도의 벽지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산업화로 도시와 농촌 간의 의료 서비스 격차가 벌어지자, 정부는 1980년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무의촌에 보건진료소를 설치할 것을 법제화했다. 보건진료소에 배치될 인력으로는 특이하게도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선정됐다. 당시 의사보다 간호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아 인력을 구하기가 비교적 쉬웠을 뿐만 아니라, 간단한 직무 교육 후 곧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어 시간적‧경제적 측면에서도 효율적일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 보건진료소엔 한 명의 보건진료원이 보건진료소장 겸 유일한 직원으로 상주하며, 의사가 아니더라도 이들에겐 일정 범위 내에서의 의료행위가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보건진료소가 들어선 지역은 다른 행정적 지원마저 어려운 경우가 많아, 진료를 뒷받침할 기반 시설이 사실상 전무했다. 경남 거창군 고학보건진료소 이경영 소장은 처음 한 섬마을로 발령받았을 때를 회고하며 “당시는 보건진료소장이 아예 근무 지역에 거주해야 했는데, 여자 혼자 사는 건물에 변변한 방범창도 없어 많이 불안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팩시밀리가 없어서 먹지로 보험을 청구하기도 하고, 주민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걸어서 일일이 산골을 방문해야 했다”며 당시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묘사했다. 주민들의 보수적 태도와 무지에서 비롯하는 편견과 거부감 역시 활동에 걸림돌이 됐다. 당시 보건진료소의 주요 업무엔 가족계획을 위한 피임방법 교육이 포함돼 있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보건진료소장이 가정방문을 했다가 “남의 집 대를 끊어놓을 생각이냐”며 문전박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채혈 검사나 수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보건 사업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주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초창기 보건진료소장들은 이런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의 일원으로서 주민들과 소통하며 유대를 키워나갔다. 농어촌 주민들 대부분이 아침부터 일을 나간다는 점에 착안해 새벽에 예방접종을 해주는 식으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계몽 사업 역시 활발히 전개됐다. 당시 농어촌은 의료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이에 보건진료소장들은 피임, 금연, 위생 교육 등 기본적인 보건 교육에 덧붙여 한글을 가르치거나 다양한 문화교실을 운영하는 등 전반적인 농어촌 문화 선도에 앞장섰다.

이러한 지역 밀착형 관리에 힘입어 농어촌 지역의 보건 수준은 단기간에 급격히 향상됐다. 보건복지부는 「2011년 농어촌 보건의료개선사업 보고서」에서 일차보건진료 인력을 두고 “가족계획 실시율 증가, 예방 접종률 확대, 결핵 환자 조기 등록 관리 수 증가 등과 같은 성과를 내 대한민국 보건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농어촌에 변변한 병원 하나 없던 시절, 보건진료소는 비위생성과 무지로부터 지역 주민들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노인만 남은 농촌, 병원이 생겨버린 도시

경상남도 거창군 율리보건진료소. 도심의 병원까지는 10km 남짓 떨어져 있다. (사진제공: 구글 지도)
경기도 시흥시 연성보건진료소(현 연성행복건강센터). 약 1km 떨어진 곳에 개인병원이 있다. (사진제공: 구글 지도)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며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은 빠르게 고령화됐다. 보건진료소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던 가족계획이나 피임 교육 역시 관할 구역에 청년층이 사라지자 덩달아 무색해졌다. 이런 현상은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다. ‘농촌형 보건진료소’(사진①)들은 지역 주민의 고령화에 발맞춰 업무 내용을 노인 건강관리 중심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경남 거창군 율리보건진료소 김양희 소장은 “전체 인구는 감소하고 노인 비율이 증가했기에 진료보다는 건강증진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사업 방향이 바뀌고 있다”며 “건강 걷기, 요실금 예방 운동, 치매 예방사업 등을 거창군 보건소의 지원을 받아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 지역 양지보건진료소의 손계순 소장 역시 “초창기에는 자상, 열상 등으로 찾아오는 급성질환 환자가 많았지만, 이제는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자가 절대적으로 많다”며 “시대와 환경에 맞게 보건진료소의 역할도 변화해나가는 것”이라 설명했다.

한편 이미 보건진료소 주위에 상당한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돼 일차의료시설로서의 역할이 아예 무색해진 경우도 있다. 경기도 시흥시는 ‘도시형 보건진료소’(사진②)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시흥시에 있던 보건진료소 대부분은 진료 기능이 사라졌다. 공식적 명칭마저 ‘행복건강센터’로 바뀌었다. 행복건강센터는 주간노인보호센터 등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흥시 신현행복건강센터 서숙정 책임관은 “보건진료소라는 지역보건체계가 이미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역할의 전환이 가능했다”고 부연했다.

보건진료소마다 지역 사정에 맞춰 건강증진사업을 시행한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서숙정 책임관은 “신현행복건강센터의 경우 저소득층 노인이 많기 때문에 공동작업장을 운영하는 등 일도 하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다른 시흥시 내의 행복건강센터 역시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보건진료소장에게 나름의 사업을 진행할 재량권이 주어진 덕분에 맞춤형 복지가 이뤄질 수 있었다는 게 서 책임관의 설명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

보건진료소의 존재가 필요한지는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최초 설립 목적이었던 ‘무의촌 의료서비스 제공’은 의료시장이 포화된 지금 사실상 달성됐다. 남아있는 보건진료소의 관리에 허점이 많다는 지적도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문제점은 건강증진사업의 범위 및 효과가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다. 홍현화 교수(경남대 간호학과)는 “보건진료소의 역할이 보건진료소장 개개인의 역량에 지나치게 의존적”이라고 지적했다. 보건진료소의 업무는 이미 건강증진사업 쪽으로 상당 부분 넘어왔음에도 법적으론 여전히 일차의료를 보건진료소의 주 역할로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보건진료소의 사업은 대부분 ‘보건진료소장의 선의와 열정’과 같은 불안정한 요소에 좌지우지된다. 보건진료소장들 역시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서숙정 책임관은 “지금은 공무원이라는 현실적 이점을 보고 보건진료소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적절한 동기 부여 없이는 보건진료소의 안정적인 복지 서비스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 전망했다. 손계순 소장 역시 “건강증진사업은 대부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식”이라며 체계적인 상부 기관과의 연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건진료소 특성상 보건진료소장들에게 허용되던 일정 수준의 자율성이 되려 제도의 체계화를 방해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영주 교수(경남대 간호학과)는 “보건진료소장들이 중앙 부처에서 멀리 떨어져 개별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상부 기관에서 지시가 내려오더라도 기존에 하던 업무가 아닐 경우 협조에 소극적으로 나온다”며 “연구를 위해 보건진료소를 방문하는 것조차 자신의 일터를 침범한다며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꼬집었다. 다만 이런 보건진료소의 자율성은 지역 실정에 맞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만큼, 보건진료소의 자율성 보장 정도와 관련해서는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보건진료소의 숫자를 대폭 줄이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기존에 있던 보건진료소를 폐쇄하겠다고 할 경우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에게서 혜택을 앗아간다고 여겨 강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민들의 심리를 의식해 지역 국회의원들 역시 보건진료소 감축보다는 현상 유지 및 증설하는 쪽으로 힘을 쏟고 결국 보건진료소 감축은 지역 이기주의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지영주 교수의 설명이다. 실제로 보건진료소의 숫자는 1980년 이후 지속적으로 병원의 수가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상승세를 그려 왔다.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2019년 농어촌 의료서비스 개선안’에도 보건진료소 신설을 가능한 한 지양한다고 적혀있을 뿐, 통폐합에 관한 별다른 언급은 적혀있지 않다.

보건진료소의 서비스를 안정화하면서도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으로 지영주 교수와 홍현화 교수는 ‘지역사회 통합건강증진사업’을 꼽았다. 지역사회 통합건강증진사업은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돼 지역 주민의 질환 예방 및 건강관리를 담당하는 사업으로, 2013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기존의 중앙집중식 국고보조사업들은 지역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사업내용을 배정하는 방식이었던 데 반해, 통합건강증진사업은 중앙 부처의 역할을 축소하고 지역 보건소의 역할을 늘려 지역 여건에 맞는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영주 교수는 “통합건강증진사업의 세부 사업은 보건진료소가 충분히 맡아서 진행할 수 있다”며 보건진료소가 통합건강증진사업의 취지를 살리는 데 매우 적합한 기관이라고 주장했다. 보건진료소장이 간호사라는 점을 살릴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하자는 의견도 있다. 일례로 경상남도는 올해 들어 지역 암센터와 보건진료소를 연계해 농어촌에 사는 암 환자를 위한 돌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안에 따르면 보건진료소장은 관할 지역 암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역할을 맡게 되며, 암 환자는 퇴원 후에도 집에서 건강 상태를 점검받을 수 있다. 홍현화 교수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보건진료소의 역할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운영 형태를 재정비한다면 충분히 지역 보건에 이바지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건진료소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삽화: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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