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 10주년: 구술사의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다

역사의 순간은 지나가더라도, 사람의 기억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은 기록이 미처 남기지 못했거나, 일부러 무시했던 부분을 드러내기도 한다. 구술사(Oral History)는 바로 이런 기록의 맹점을 포착해, 역사의 빈칸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구술사는 1980년대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기록되지 못한 민주화 운동의 숨겨진 진실을 비추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90년대엔 텍스트 중심의 학문을 비판하고 보완하는 방법론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 정부 기관의 지원과 함께 학문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확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구술사는 기존 연구가 비교적 활발하던 역사학·사회학·인류학뿐만 아니라, 정치학·예술학·의학사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돼 학문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구술사 연구는 단편적인 사례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어, 현재 구술사 연구의 거시적인 측면에 관한 정보는 충분히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2009년부터 총 1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국가사업비가 투입된 현대구술사연구사업이 막바지에 달했다. 이에 『대학신문』은 해당 사업의 성과를 중심으로 현재 구술사의 위치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가. 인간과 역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구술이 있다

“동탄면 영천3리에 살던 최영호 씨는 신도시 개발 직전 젊은 마을 이장이었다. 그는 어느 날부터 찾아오는 외지인들의 발걸음에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마을의 기록들을 모으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최영호 씨는 새마을운동 당시 영천리를 방문했던 대통령방문기념비, 방명록 사본, 마을회관에 달려있던 종, 명판 등 5톤 트럭 한 가득의 기록들을 자신의 비닐하우스에 옮겨두었다.

최영호 : 그게 [신도시 개발 당시에] 제일 실패한 게 뭐냐면. 이 동네 옛날 자료들을 보관을 안 했다는 거. 방치했다는 거. 그건 아쉬워. 저희 같은 경우는 제가 동네돈 들여서 동네재산 저희 하우스로 갖다 다 실어다 저 5톤차 한 대 불러가지고. 저희 같은 경우는. 하하하

(중략)

최영호 : 하하하. 너무 빠진 거죠. 너무 심하게 빠진 거지. 하하하

면담자 : 마을에 빠지신 거예요?

최영호 : 하하하”

- 최정은, 「공동체아카이브, 복수의 주체의 가능성 - 동탄 신도시 원주민 구술기록 수집을 사례로」,

2016년 8월 19일, 동탄 신도시 구술자 자택, 최영호의 1차 인터뷰 중에서

구술사를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학자마다 이를 정의하는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일찍이 역사 기록으로서 구술사를 강조했다. 도날드 릿치와 같은 구술사가는 구술사를 “인터뷰 기록을 통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구술 기억과 개인적 논평을 수집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반면 사회사적 전통이 강한 영국에선 구술사를 ‘대안적인 역사쓰기’로 보며 구술사에 내재한 정치성을 강조했다. 폴 톰슨 같은 영국의 구술사가는 구술사를 주류의 시각에서 쓰인 역사의 한계를 보완 또는 극복하고 밑으로부터 역사를 쓰는 작업으로 규정했다. 한국구술사연구소 윤택림 소장은 “한국에선 일반적으로 구술사를 ‘대안적 역사쓰기’란 정의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역사 쓰기보다 구술 자료를 수집하는 활동이 더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구술사는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잊지 않기 위한 ‘생존 조치’로서 필요성이 제기돼 등장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의 정체성이 강했던 셈이다. 특히 반공주의로 인해 연구 성과가 미진했던 좌익 활동에 대한 구술 수집이 활발히 이뤄졌다. 1990년대엔 제주 4.3 사건, 위안부 피해자, 미전향 장기수 등 한국 현대사의 그늘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지방과 여성으로 연구 범위가 확장됐다. 2000년대 이후엔 정부 기관의 활발한 연구 지원 하에 과거사 규명은 물론 예술사, 지역사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구술 수집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국립예술자료원 정보원 과장은 “원로 예술인의 생애사 및 주제사를 정기적으로 수집하는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2003년부터 매년 주요 예술인들을 인터뷰해 『한국근현대예술사구술채록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귀옥 교수(한성대 교양학부)는 「한국학 발전을 위한 구술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 : 구술사 연구 동향과 쟁점」에서 “구술사는 일반 연구에서 종래 국문학의 한 갈래로 존재해온 구비전승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되고 있으며, 비교적 엄격한 방법론을 요구하는 학위 논문에서도 기록학 분야를 중심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 분야로서 구술사의 체계화·조직화도 이어졌다. 2009년 한국구술사학회가 창립됐고, 2010년엔 다방면에 존재하는 구술사 연구자들을 하나로 묶고자 구술사연구네트워크가 결성됐다. 윤 소장은 “구술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워크숍을 개최해 현실 문제를 논의하자는 취지에서 구술사연구네트워크를 결성했다”며 단체 창립 배경을 얘기했다.

나. 구술사를 향한 다양한 시선

한국의 구술사는 일종의 사회 운동으로 시작돼 학계로 유입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구술 자료를 사료로 활용할 때 연구방법론으로 부적절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다. 구술사가 ‘심층 인터뷰’ 내지 ‘심리 치료’와 구분되기 어렵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이는 구술사가 ‘텍스트로서의 학문’에 비판적·보완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 말과 기억을 강조하는 방법론을 택하고 있기에 생길 수 있는 의문이다.

구술사 인터뷰 방식은 제주 4.3 사건과 같은 특정 주제에 대한 주제 인터뷰, 명망인의 업적과 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바이오그래피컬 인터뷰, 태어날 때부터 구술 당시까지의 삶 전체를 다루는 생애 인터뷰까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한국구술사연구소 윤택림 소장은 “이 중 심층 인터뷰나 심리 치료는 구술사에서 말하는 주제 인터뷰와 일부 성격을 공유할 뿐”이라며 “심층 인터뷰는 연구자가 알고 싶은 것을 집중적으로 묻는 것에 반해, 구술사 인터뷰는 구술자가 하고 싶은 얘기를 듣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며 양자 간 차이를 설명했다.

기록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문헌연구방법론이나 통계기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양적 방법론에 반해, 인터뷰 자체가 연구 방법인 구술사에서는 연구자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구술사가들은 구술이 면담자와 구술자의 공동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역사학자 정혜경 씨는 “구술 자료와 문헌 자료 간 차이점 중 하나는 쌍방향성”이라며 “같은 구술자와 면담자라 해도 인터뷰 현장에 따라 다른 내용이 가능하고, 이후에 동일한 상황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면담자는 현장에서 구술 내용 속 욕망, 무의식, 트라우마, 모호함 등을 포착하고 재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구술사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구술성과 주관성을 들 수 있다. 이재성 교수(성공회대 노동사 연구소)는 「한국정치사와 구술사: 정치학을 위한 방법론적 탐색」에서 “구술성은 문자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억양, 고저, 강약, 속도 등 다양한 음성적 특징들을 통합적으로 활용하면서 인간의 내면성을 통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설명했다. 한편 이 교수는 “주관성은 객관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같은 사건이라도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의 세계관, 시점, 관계 등에 의해서 매우 다른 해석과 평가가 내려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술성과 주관성을 연구에 얼마나 반영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은 여기서 출발한다. 역사학계에선 많은 경우 구술성과 주관성에 내재한 위험을 경계하면서 구술 사료의 활용을 ‘문헌이 없는’ 곳에 한정하고자 한다. 박찬승 교수(한양대 사학과)는 『마을로 간 한국전쟁』에서 “구술 증언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사실은 그 기억이 왜곡됐거나 선택된 기억일 가능성을 내포한다”며 마을 주민들의 구술 증언이 부정확하거나 편파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동원 연구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역사학은 1차 자료가 충분히 있는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구술 자료만 갖고 역사상을 그리지 않고 되도록 구술사를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구술사가들은 구술 사료가 단순 사실 확인을 위한 자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호연 교수(한양대 미래인문학융합학부)는 “구술사가는 인터뷰 과정에서 왜곡된 기억 또는 역사의 퍼즐을 꿰어 맞추게 된다”고 말했다. 구술의 목적은 기억의 주관성 속에 숨어있는 ‘선택적 망각’ 또는 ‘의식적·무의식적 왜곡’ 자체를 포착하는 것에 있으므로, 구술 내용이 왜곡됐다고 해서 사료로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구술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병존하고 있는 만큼, 구술사가 다루는 학문의 분야 또한 다양하다. 윤 소장은 “구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무용, 사회복지, 체육 등 생전 만나볼 기회가 없는 분야의 연구자들도 자주 접하게 된다”며 “간학제적인 성격이 구술사의 연구 분야를 넓히고, 독창성을 부여하는 데에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구술사가 생소한 분야의 구술사가는 여전히 연구 진행에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김세은 교수(강원대 신문방송학과)는 “소위 ‘과학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언론학 분야에서 구술사의 사용은 지극히 제한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며 “구술사 연구를 위해선 오랜 기간 충분한 관심과 관찰, 이해를 통해 역사에 스며든 사회적 의미를 추출해야 하는데, 정량평가로 대표되는 대학 평가 방식에서 구술사 같은 ‘느린’ 연구는 시도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 이제까지의 10년, 앞으로의 10년

2000년대 각종 이론적 논쟁과 함께 구술 자료를 수집하는 시도가 축적되며, 문제의 초점은 수많은 구술 자료를 어떻게 관리하고 더 넓게 활용할 것인가로 넘어갔다. 특히 쌓여가는 구술 자료를 온라인과 오프라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아카이빙(Archiving)의 필요성이 커졌다. 구술 아카이브란 구술 자료를 보존하고 정리해 집합적으로 축적하는 기관 내지 시스템을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충로 박사는 “2005~6년경부터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아카이브의 필요성이 대두하기 시작했다”며 “아카이빙 작업은 개인 차원으로는 사실상 진행이 불가능하며, 기관 차원에서도 굉장한 자원을 요구하는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구술 아카이브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한국학중앙연구원은 2009년부터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을 진행했다. 3년씩 3단계(단 마지막 3단계는 4년)에 걸쳐 진행된 이 사업을 통해 ‘현대한국구술자료관 아카이브 시스템’의 기본 체계가 완성됐다. 아카이브는 크게 관리 체계와 서비스 체계로 구분되는데, 관리 체계에선 아날로그와 디지털 두 가지 방식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보관한다. 관리 체계에 있는 콘텐츠는 자막, 영상, 이미지 등 각종 형태로 사용자에게 서비스된다. 아카이브 사업단을 주도한 윤 박사는 “자료의 수집부터 관리, 서비스까지 모든 과정에 관한 지침을 표준화한 것이 우리 사업의 큰 특징이자 성과”라고 말했다.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은 아카이브 구축 사업 외에도 그동안 구술사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경제 관료, 정치인, 군인 등 엘리트 계층을 주요 구술자로 삼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연구자들은 엘리트 구술 인터뷰를 통해 특정 사건에 대한 예상치 못한 시각이나 인과 관계를 꿰뚫을 힌트를 찾게 된다고 말한다. 해당 사업에서 ‘한국현대사와 군’ 주제에 참여 중인 김수향 연구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비록 자신의 기록이 있는 엘리트의 구술이라고 해도, 종종 본인이 남겨둔 기록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문서로는 남기기 어려운 ‘공공연한 비밀’을 털어놓기도 한다”며 베트남전 사례를 예로 들었다. 베트남전 당시 연대장들이 훈장을 받을 때는 베트콩을 얼마나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했나가 기준이 됐다. 그러나 구술 자료에 따르면, 사실 남베트남군 무기이거나 암시장에서 샀던 것을 ‘노획’한 무기라며 실적을 부풀려서 훈장을 받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김 연구원은 “물론 구술자 본인이 했다고는 안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기 동기나 선후배 중 유명 인사를 비판하기도 한다”며 “생생한 증언은 당시 신문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점을 알게 하고, 연구자로서 당대 사람들의 감정이나 심성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한다”고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구술사 연구에 다양한 성과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있다는 게 학계의 목소리다. 윤충로 박사는 “10년 간의 사업을 통해 구술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사회적 입지 역시 확대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서도 “구술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활발해진지 채 15년도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구술사연구소 윤택림 소장은 “가장 큰 문제는 구술 자료를 사료가 아닌 출판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여겨 사료에 대한 적절한 아카이빙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출판 자료는 출판 과정에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윤문과 삭제 등 편집을 거쳐야 하다 보니 구술성과 주관성이 온전히 남아있는 사료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출판 목적으로만 자료를 수집하니, 이후 과정에서 정작 원사료는 제대로 관리받지 못한다고 윤 소장은 설명했다.

또 하나 지적되는 점은 구술사를 학계에서 교육하고 훈련하는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혜경 씨는 “구술 자료의 양적인 팽창은 이뤘지만 내실은 매우 취약하다”며 “구술 자료를 활용했으나 문헌연구방법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연구가 구술사연구방법론이란 외피를 달고 발표되는 등 학계에서조차 구술사에 대한 고민이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윤 소장 역시 “구술사의 가장 큰 취약점은 제도적으로 학과도 없고 교수도 없다는 것”이라며 “연구 분야로선 어느 정도 자리 잡았으나, 교육에 있어서는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학문이라 제도적인 지원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집된 구술 자료의 양에 비해, 문화 콘텐츠로 활용되는 경우도 적다. 윤충로 박사는 “아카이브 콘텐츠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창작처럼 후속 작업이 진행돼야 한다”며 “아이디어가 있어도 현실적인 기술이나 예산의 문제 등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정보원 과장 역시 “채록된 구술 자료는 편집 과정 없이 말투가 그대로 들어가 있고 분량도 많아,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아직은 사회적인 활용 방안보단 자료를 좀 더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라. 당신의 구술, 당신의 역사

“혼자 할 수 없는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공동작업의 힘이랄까. 고통의 이야기는 언어가 그 고통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오히려 말을 받아온다는 느낌을 받는다. 힘든 시간을 보낸 구술자(유족),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또 사는 힘이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 이호연 작가, ‘기억하는 사람들, 기록하는 사람들: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의 세월호 이야기’ 워크숍에서

“벌교 장자마을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지난 7월 24일 한동연 교수(한국외대 문화콘텐츠학과)가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열린 ‘구술사 시민 강좌’에서 문뜩 던진 질문이다. 마을 이름에 관한 기존 자료가 거의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 교수는 마을 이장들과의 구술 면담을 통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옛날부터 벌교는 뗏목다리라는 의미로 쓰였고, 이름의 유래가 ‘신선, 사람, 부처가 서로 돕고 살아서 ‘장좌’라 불렀다’라는 설과 ‘부자(장자)가 살아서 장자라 불렀다’는 얘기를 확보한 것이다. 한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엮어서 보성문화원과의 연계 하에구술 내용을 시각화해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리소스북’을 편찬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이어진 강연에서 “수집 중심의 활동이 계속되던 한국 구술사 연구에서 점차 대중에게 공유되는 ‘이야기’로서 구술 자료를 기획, 정리해 서비스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귀옥 교수는 “구술사 연구는 대개 많은 비용이 소요돼 국가, 시민사회단체 등의 공적인 비용이 연구를 촉진하기 십상”이라며 “이런 점에서 구술 자료나 연구 결과물은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없는 공공재다”고 얘기했다.

구술사의 공공재적 특징으로 인해, 사료로서 ‘진실’ 찾기라는 본래 목적 외에 문화 콘텐츠 창작, 트라우마 치료 등에도 활용 가능하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세월호 참사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당사자들의 생생한 구술을 받으며, 당시의 사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활동이 대표적이다. 지난 21일(수) 마포구 ‘청년문화공간 JU 동교동’에서 열린 ‘민주화운동의 망각과 침묵, 재현으로의 구술사’ 워크숍에서, 한국춤문화자료원 최해리 공동대표는 민주화운동 시기 ‘진혼굿’의 창시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무용가 김영란의 구술 사례를 발표했다.(사진①) 발표에서 최해리 대표는 “처음엔 민주화 얘기를 피하던 김영란 선생이 점차 구술에 익숙해지며 자신의 춤을 시범해 보이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며 “구술이 김영란 선생에게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기억을 ‘재구성’하는 건강한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호연 교수는 “우리는 역사의 상흔을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 채 억압된 기억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구술사는 진실 찾기와 치유라는 이중의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며 구술사가 가지는 다양한 가능성을 강조했다.

유럽 종교혁명의 진행을 연구한 피터 마셜 교수(영국 위릭대 사학과)는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을 둘러싼 경제적, 문화적, 심리적 요소에 지배받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기억이 만든 이야기에 의존해 살아간다. 좋은 이야기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에너지가 되지만, 나쁜 이야기는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리고 구술은 당신이 그저 ‘말함’으로써 새로운 진실에 도달하고 때로는 고통을 치유해주기도 한다.

오늘, 당신의 삶은 어땠는가? 어쩌면 구술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좋은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사진: 황보진경 기자 hbjk0305@snu.kr

삽화: 손지윤 기자 unoni0310@snu.kr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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