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2017년에 제작된 넷플릭스 드라마 <친애하는 백인 여러분(원제:Dear White People)>은 미국 사회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다룬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드라마가 노예제도나 인종분리정책이 존재하던 시기의 미국이 아닌, 동시대의 미국 대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흑인이 오늘날에도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편견을 폭넓게 그려낸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주인공에게 경찰관이 총을 겨눈 장면은 이 드라마가 제작될 당시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참고해 각색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별, 성적 지향, 출신 배경 등에 따른 흑인 사회 내부의 차이 역시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어, 이 드라마는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역사상 인종차별, 특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저마다 다르다. 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100년이 훌쩍 넘었고, 모든 인종은 동등한 선거권을 누린다. 심지어 지난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흑인이었다. 최근 화제가 된 산이의 ‘페미니스트’라는 노래엔 “여자와 남자가 현시점 동등치 않다는 건 좀 이해 안 돼, 우리 할머니가 그럼 모르겠는데 지금의 너가 뭘 그리 불공평하게 자랐는데”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이 가사가 그의 진심인지, 아니면 그의 해명대로 ‘모순적인 성차별주의자’를 표현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런 논리는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은 차별에 반대하십니까?’라거나, ‘당신은 소수인종이나 여성도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엔 응답자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한다. 그래서 시어스(Sears), 앨킨(Alkin) 등의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의 은밀한 ‘차별적 태도’를 측정하기 위해선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꼽은 현대적 차별주의의 한 요소는 ‘오늘날에도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이제 충분히 평등한 세상이 됐으니 소수자를 배려·우대하던 사회적 흐름은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과 관련이 돼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통계자료와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상은 세상이 여전히 여성과 소수인종에게 차별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소수자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이제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정도면 만족하라’는 말과 같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과거에 행해진 차별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차별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성차별이 훨씬 더 심한 국가도 있으니 한국 여성들은 감사한 줄 알아야 한다’는 입장과 유사하다. 과거의 차별이 더 심각했다고 해서, 다른 문화권의 소수자들이 더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지금 이곳의 소수자들이 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성취한 정의를 기념하거나 우리가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군사독재는 30년 전에 끝났고 세계에는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국가도 많지만 우리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 선거제도 개혁을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노예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제도였는지 목청 높여 비판하고,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한스럽게 사셨는지 슬퍼하며 눈물짓는 일은 간편하다. 내 잘못도 아닐뿐더러, 이미 끝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도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걸, 어쩌면 나도 이 차별적인 세상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어렵다. 쉬운 일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할 때 세상은 조금이나마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신중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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