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 편 | 서울대 미술관 전시 ‘미니멀 변주’ 평론 기고

첫걸음은 오인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미니멀 변주’ 전시 표지와 함께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이 미술관 아담한 앞뜰에 우뚝 선 이정섭의 도널드 저드 ‘풍’ 콘크리트 작품 ‘탑’(2018)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변주라면...’

마음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짐을 느끼며 느릿하게 들어선 내게 미술관 2층 전시장 입구에 마련된 텍스트는 오인의 발걸음을 한 번 더 재촉한다.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다른 무엇보다도 ‘조형성’을 우선합니다. (...) 서울대학교 미술관의 이번 전시 ‘미니멀 변주’는 형식상 미니멀리즘으로 분류할 수 있는 최근의 작품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 이처럼 ‘미니멀 변주’는 미니멀리즘의 수용, 개진, 비판을 총망라했습니다.

텍스트는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을 거침없이 ‘조형성’으로 환원하고, 전시된 작품들을 그러한 것으로서의 미니멀리즘 ‘변주’로 규정한다. 그렇게 텍스트는 작품들을 만나기도 전에 그들을 바라보는, 다소간 오인의 소지가 있는 시선의 틀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시를 보고 난 후의 소회는 전시된 작품들이 ‘미니멀리즘의 변주’가 아니라, ‘가장된 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이었다. 표면만, 혹은 무늬만 미니멀리즘이라고나 할까. 11인 작가들의 ‘일견’ 미니멀한 작품들은 이면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몇 작품만 예로 들어보자. 제목에서는 미니멀리즘보다 몬드리안의 요소주의(Elementalism)가 더 선명하게 환기되는 이정섭의 ‘Element’(2012). 첫눈엔 미니멀하다 못해 심심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작품에 다가서면 짙은 흑갈색에 가렸던 나뭇결, 패인 구멍, 옹이 등이 선명하게 보이면서 그 미니멀한 형식이 지닌 진짜 의미가 드러난다. 이정섭의 작품에서 미니멀한 형식은 일종의 균형추와도 같은 것이다. 물푸레나무처럼 나뭇결이 선명하고 옹이와 패임이 많은 재료의 강한 비정형성이 작품의 조형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미니멀한 형식은 미니멀리즘의 변주로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과 비정형의 시각적 변증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미니멀 변주’라는 개념으로 그 시각적 변증을 직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 장재철의 작품에서 미니멀한 형식은 과정상 도입된 수행적 요소도 아니거니와 조형적 궁극도 아니다. 매끈하고 단출해 보이는 표면 뒤에 상상하기 힘들 만큼 응축된 노동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Time-Space’(2010)의 미니멀한 형식은 일종의 위장술이다. 마치 기계로 사출한 듯 매끈하고 미니멀한 외관에서 누가 작가의 수고로운 수작업을 떠올릴 수 있을까만, 그는 굳이 자신이 손수 물리적 힘을 가해 변형시킨 캔버스의 표면을 전동사포로 섬세하게 갈아내어 다듬고 공업용 스프레이로 스무 차례 이상 덧뿌려 금속 혹은 플라스틱의 균질적인 질감을 만들어냈다. 처음엔 미니멀한 표면이 눈길을 사로잡지만, 일단 그 뒤에 감춰진 집요한 수공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작품의 미니멀한 형식은 그 수고로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반사판이 돼버린다. 보는 이의 주목은 표면의 매끄러움을 타고 미끄러져 이면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너무나 생생하게 잘 그려져 제욱시스로 하여금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게 만들었다던 파라시오스의 베일 그림처럼 장재철의 미니멀한 형식은 미니멀한 형식 그 뒤를 가리킨다.

편대식의 작품은 외견상 장재철의 작품과 일정한 대척점을 이룬다. 그의 거대한 작품 ‘순간’(2017)은 작가의 노동집약적인 수고를 고스란히 표면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지의 질감 위에 더해진 흑연의 거칠고 짙은 광택감은 압도적인 물성을 뽐낸다. 그러나 그처럼 엄청난 규모로 수행된 단순하고 반복적인 그리기 행위는 보는 이에게 작품 제목과는 상반된, 영원으로 뻗어나가는 시간을 환기하면서 작품을 작가 현존의 흔적으로 변모시킨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미니멀한 형식이기에 앞서 지표적 기호(indexical sign)로 작동한다. 온 카와라의 날짜 페인팅이 오버랩된다.

I'm still alive.

오완석의 작품 ‘Underpainting’(2014)은 상상력의 문제를 다루고 싶은 듯하다. ‘밑칠’이라고 직역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작품 제목은 어떤 대상을 화가들이 언더페인팅 기법을 사용할 때처럼 아직 덜 완성된 상태, 그러나 그로부터 완성된 상태가 어느 정도는 추론될 수 있는 상태로 제시함으로써 보는 이들이 스스로 머릿속에서 작품을 완성하게끔 하는 전략의 일환이다. 전시장 바닥에 그저 네모 모양의 선으로 공간을 만들어 둔 ‘중요한 생각을 하는 네모’(2012)도 같은 전략을 사용한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오완석의 미니멀한 형식은 작품 조형의 종착지가 아니라, 관람자가 상상 속에서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경유지의 성격을 띤다.

최은혜의 라이팅 작업들도 오완석의 작품들과 비슷한 결을 공유하는 듯하다. 도형의 모서리에서 새나오는 빛의 선은 어쩌면 축자적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환영적일 수도 있는, 확산적인 생성의 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담백한 미니멀리즘의 변주로 느껴졌던 것은 이은우의 ‘FRP’(2015)였는데, 막상 제목을 풀어헤쳐 놓고 보면 이 작품이야말로 제대로 뒤통수를 치는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누가 봐도 합판을 포개 만들고 페인트칠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이 실은 유리 강화 섬유 플라스틱(Fiber Reinforced Plastic)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제목과 작품 캡션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미니멀한 형식과 물성에 대한 생생한 현상학적 체험은 무슨...

그렇게 이은우에게 한 대 얻어맞고 전시장을 돌아 나오며 깨닫게 되는 것은 이번 전시 작품들의 ‘미니멀한 조형성’은 추구된 목적으로서의 미니멀이기보다는 작가들 각자가 다양하고 고유한 예술적 고민, 목적, 가치를 추구하는 노정에서 만나 우연히 공유하게 된 동음이의어(Homonym)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혹시 전시 타이틀 ‘미니멀 변주’에서 ‘변주’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오인의 틀은 그저 나 혼자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얼핏 생각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하다. ‘동음이의어’가 겉보기엔 같으나 속의 본질이 다름을 뜻하는 데 비해 ‘변주’는 동일한 무언가를 중심축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부분적으로 일정하게 다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전시회 도록 역시 ‘미니멀 변주’ 전시 기획자들이 이 다양한 작품들을 어떻게든 역사적 사조로서의 미니멀리즘과 연관해서 해설하려 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실, ‘지금 여기’에서 이제 막 생산되고 있는 작품들을 미술사라는 통시적 의미의 축으로 포섭하려고 할 때 손을 뻗게 되는 가장 흔한 전략이 이번 전시에서처럼 이미 그 의미와 가치가 정립된 유명 사조와의 유사성과 차이의 수사학을 구사하는 것이다. 중견작가들의 작품도 그러할진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미술계가 1970년대 단색화를 서양의 모노크롬이나 야나기 무네요시 풍의 백색 담론으로 환원해 읽어내면서 사장된 단색화의 고유한 의미들을 되찾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보자. 2010년대에 와서 단색화를 ‘Dansaekhwa’라는 고유명사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잃어버린 고유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는 이미 충분히 유명해지고 의미가 부여된 다음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일리 있는 논박도 가능하겠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유명한 해외 사조에 기대는 의미화 방식이 피할 수 없는 상실의 측면이다.

‘미니멀리즘의 변주’라는 규정 또한 무언가 중요하고 고유한 차원을 상실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전시의 기획자들은 흥미로운 우리 시대 ‘미니멀’ 조형 작품들을 잘 거둬들였으나, 그것들을 역사적 미니멀리즘에 묶어버림으로써, 그것도 역사적 미니멀리즘을 조형성으로 단순화시켜가며 묶어버림으로써 역사적 미니멀리즘의 고유성도 증발하고, 전시된 작품의 고유성도 잘 드러나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을 초래했다. 아마도 너무나 거침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특정 작가나 작품 유형을 띄우는 데 거침없는 수사가 유효하다. 단, 득이 실보다 많을 때만 쓸 만하다.

역사적 미니멀리즘을 중심에 놓고 11인의 작품들을 그것의 변주로써 이해하는 의미화 방식을 통해 정말 주목해야 할 고유한 의미들의 주목할 만한 특정한 방식들은 은폐되거나 충돌을 통해 무력화된 것은 아닌지. 전시 기획의 틀을 확정하기 전 조금 더 머뭇거리고 조금 더 주저해, 다소 느슨한 울타리만 두르는 기획이면 어땠을까. 그리하여 각각의 작가와 작품이 고유하게 단독으로 피어날 수 있었더라면, 작가와 작품과 관람자 모두가 더 즐겁지 않았을까. 서울대 미술관의 2019년 다가올 전시들은 작품의 고유한 단독성(singularité)이 존중받는 그런 전시들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유한 단독성으로 존중받으며 살고 싶듯이.

정수경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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