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시화를 통해 전해진 꿈의 발걸음

고운 한복을 입은 어르신들이 작은 단상 앞에서 담담한 목소리로 시를 낭송한다. 그 시는 한글을 배우고 있는 어르신들이 직접 적어낸 시다. 지난 27일(화) 문화관(73동) 전시실에서 막을 올린 ‘다시, 꿈을 꾸다’엔 비뚤어진 글씨와 예쁜 그림이 어우러진 시화로 가득했다. 시인이 된 어르신들과 이 시에 아름다움을 입힌 서울대 미대, 선화예고 학생들은 함께 다시 꿈을 꿨다.


더 이상 부끄러워 않는 시인과 어린 화가의 동행

이 시화전은 어르신들이 한글을 배우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선의관악종합사회복지관’ 이정희 팀장(33)은 “늦은 시기에 한글을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어르신이 많았다”며 “직접 쓴 시로 시화전을 열면 어르신들이 한글을 배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다시 꿈을 꾸다’는 어르신들이 자신감을 갖는 데 큰 몫을 했다. 박의순 할머니(73)는 “이제까지 한글을 몰라서 표현할 수 없었던 내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어 행복하다”며 “가슴 한구석에 맺혔던 응어리가 해소된 느낌”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그는 “이제는 시인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고 웃어 보였다.

이 시화전은 세대 간 교류에 그 의미를 두기도 했다. 이 팀장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6·25 전쟁이나 일제강점기와 같은 역사적 사건과도 관련돼 있다”며 “시화전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노인 세대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길 원했다”고 말했다. 시 ‘꿈’의 시화를 그린 이혜리 씨(서양화과·17)는 “6·25를 겪으며 동생과 헤어져야 했던 어르신의 시절이 시를 통해 전해졌다”고 어르신과 함께 작업한 당시를 떠올렸다.


마음에서 우러난 시, 시에서 비롯된 그림

선의관악종합사회복지관의 한글교실 담당자들은 지난 3월부터 어르신들과 함께했다. 그들은 시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다. 이 팀장은 “처음엔 소풍, 고향, 그리운 사람과 같은 주제를 제시해 어르신들이 보다 쉽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이 팀장은 평소 어르신들의 대화 내용을 녹음해 어르신들과 함께 들으며 시상을 구상했다. 이렇게 완성된 58편의 시는 10월에 학생들에게 전달됐다.

학생들은 시와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힘을 쏟았다. 시의 정서를 담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담은 시 ‘벚꽃’을 작업한 이승은 씨(동양화과·14)는 “시를 쓰신 어르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기 위해 고민했다”며 “순수했던 지난 시절을 표현하기 위해 오일파스텔과 동양화 물감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은 관람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정운 씨(건설환경공학부·18)는 “시 ‘막내딸’에 ‘사랑한다 임경주 사랑한다’는 구절과 딸을 안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함께 보여 뭉클했다”며 “나를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어르신들과 직접 소통하며 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시를 문서로만 전달받아선 그림을 그리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대 학생회장 장희진 씨(동양화과·15)는 “시만 읽고선 그 시의 정서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며 어르신들과 만남을 추진해 적극적으로 소통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시를 깊이 이해한 후 시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만남에 함께한 이혜리 씨는 “시 ‘꿈’을 처음 읽었을 때 슬픔을 느꼈지만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은 후엔 강한 의지와 포근함을 느꼈다”며 “공허함을 표현했던 이전의 그림을 모두 지우고 감싸 안는 듯한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다시, 꿈을 꾸다’는 “너는 크면 작가가 돼라”는 작은아버지의 말에 작가의 꿈을 가진 어르신의 이야기에서 탄생했다.

펜으로 눌러 담은 시화의 진한 자취

기나긴 여정 끝에 완성된 시엔 어르신들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들이 걸어온 인생, 그들이 꾼 꿈과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새롭게 배움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이 그것이다. 시화전 준비에 참여한 빈지영 씨(서양화과·17)는 “시 하나하나에 그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가 녹아 있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고 말했다. 윤삼례 할머니(73)가 쓴 시 ‘그리운 당신’엔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다.

당신 손 잡고 절대 손 놓지 않으리

그렇게 당신을 먼저 보내지 않으리

내 손을 당신이 다시 잡아 준다면

나는 어디든 어디든 다 갈 수 있다

여보, 사랑합니다

- 윤삼례 ‘그리운 당신’ 중

별다른 기교 없이 솔직하게 눌러 담은 시지만 그 안엔 젊은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삶의 깊이가 있다. 박지희 씨(언어학과·16)는 “시에서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 글을 새로 배우면서 느끼는 감사함과 같은 감정이 투박하게 드러나 감동적”이라고 관람 소감을 전했다. 배남열 씨(수학교육과·13)는 “독특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진정성이 느껴졌다”며 “어르신들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이 생생해 큰 울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다시, 꿈을 꾸다’는 비문해 성인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눈치껏 묻고 몸을 실었던 버스

다시는 묻고 싶지 않아

수백 번을 쓰고 또 쓰고

수백 번을 쓰고 또 쓰고

이렇게 배우면 되는 것을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 최두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중

이 시엔 최두지 할머니(74)가 버스 노선을 읽지 못해 서글펐던 마음이 드러난다. 이런 감정을 시로 풀어낸 어르신들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에게 배움의 필요성을 전한다. 장희진 씨는 “나를 포함한 현 젊은 세대는 자연스럽게 글을 배울 수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비문해 성인 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했는데, 어르신들이 한글을 배우며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 팀장은 “젊은 세대가 하는 공부는 당연시되는 반면 노년의 공부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며 “비문해 어르신들의 한글 공부가 시화전을 통해 멋지게 드러났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화전을 시작으로 어르신들의 글공부는 계속된다. 황유순 할머니(72)는 “좋은 마음으로 좋은 글을 쓰며 멋진 노송처럼 늙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남보다 뛰어나진 못해도 열심히 배워 앞으로 남은 일생을 글로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다시 꿈을 꾸며 펜을 쥔 어르신들은 지금도 그들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막연하게 생각한다

내가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검정 물을 들인 머리로

일흔에 시작한 내 꿈 이야기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시작한다

이제라도 내 꿈에 날개를 달아본다

- 황유순 ‘시작’ 중

사진: 유수진 기자 berry832@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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