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미국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강연을 마쳤을 때 청중으로부터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 “맙소사, 당신 나라는 화염 속에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히치콕에 관해 말하고 있구려.” 당시는 지젝의 모국인 슬로베니아가 유고 내전에 휘말려 있을 때였다. 전쟁은 악화 일로로 치달아 결국 인종 말살과 집단 강간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이르고 있었다. 인문학자인 자신에게 가장 치명적일 그 질문에 지젝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소, 우리는 히치콕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화염 속에 죽어가고 있소.”오늘 아침 뉴스는 이라크의 팔루자에 본영을 둔 저항 세력에 대한 미군의 대공습 소식을 전해 주고 있었다. 이라크 임시 정부는 국토 전역에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바그다드에 야간 통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포염 속 어딘가에 자이툰 부대가 대한민국의 이름 아래, 즉 나의 이름 아래 ‘이라크 재건’에 힘을 쏟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관악산중 어느 연구실에 틀어박혀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고 있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맙소사, 당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야만에는 아랑곳없이, 당신은 히치콕 나부랭이나 중얼거리는 학자의 책이나 읽고 있구려.” 이 치명적인 질문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김동인이 1929년에 발표한 「K박사의 연구」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에서 K박사는 어느 날 맬서스의 인구 이론을 접하고는 새로운 연구를 시작한다. 과학의 힘을 빌어 쓸모없이 버려지는 똥을 음식으로 만들어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사회의 명사들을 초청해 시식회를 개최한 K박사. 처음에는 참 맛있는 떡이네, 이건 대체 뭘로 만들었나 궁금해하던 명사들. K박사의 연구 보고를 듣고 진실을 알게 된 그들은 며칠 전에 먹었던 것까지 다 토해내고 시식회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과학의 힘으로 인류를 구원하려는 진의를 몰라주는 사회에 실망한 K박사는 시골로 내려가 파장이 가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고기인 줄 알고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던 K박사는 그 고기가 개고기라는 사실을 알고 모두 토해버리고 만다. 그날 K박사는 변소에서 똥을 먹다가 주둥이에 똥칠갑을 하여 자신에게 다가오던 개를 목격했던 것. 그후 K박사는 사회에 대한 원망을 거두고 새로운 연구에 돌입한다.K박사의 연구가 대실패로 귀결돼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K박사에게 조수는 시식회 직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분석해보면 아무리 깨끗한 것이라 해두 똥으로 만든 것을 먹고야 왜 구역질을 안해요? 세상사는 그렇게 공식(公式)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깐요.” K박사는, 바로 그 ‘공식대로 되지 않는 부분’, 똥이라는 물질에 얽혀 있는 인간의 감정과 그것들이 누천년 동안 집적돼 성립된 문화라는 부분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실패한 것이다. 인문학은 바로 그 부분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나는 전쟁이라는 야만 속에서 나의 연구에 대해 던져진 저 치명적인 질문에 이렇게 답해야만 한다. “그렇소, 우리는 지젝 나부랭이를 숙고해보지 않아서, 바로 내 이름으로 행해지는 야만을 두고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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