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인
(경제학부·10)

요즘 들어 나에게 문학, 그리고 창작이 어떤 의미일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지금도 때때로 시모임에 나가긴 하지만, 나는 문학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삶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하지도 않았고,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를 써 놓고 나서 가끔씩 ‘도대체 이런 걸 왜 쓰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시 쓰기는 내게 별다른 이유 없이도 단지 재미있어서 하는, 일종의 유희에 가까운 것이었다.

시작은 주로, 어떤 이미지로부터였다. 예컨대 시를 처음 써봤을 때가 그랬다.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라는 영화를 보고 난 뒤였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계속 잔상처럼 남았다. 사람들이 살아있는 고래라고 믿었던 것이 거대한 모형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의 이미지였다. 그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모종의 슬픔과 먹먹함이,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시로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이미지 주변을 맴돌고 있는 단어들을 가져와 이리저리 연결하고, 변형하고, 배치하면서, 그것이 어렵고도 그 자체로 무척이나 재미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설프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좋았다.

시 쓰기는 내게 진정 어떠한 의미일까. 유희를 넘어선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래야 할 필요가 있게 될까. 답을 찾기를 원한다면 분명 더 많이 겪어봐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저 어떤 시가, 소설이, 영화가 기쁘고, 서글프고, 분하고, 아름답고, 먹먹하다. 가끔씩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부끄럽기만한 시에 생각지도 못한 큰 격려를 보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그리고 『대학신문』에 감사드린다. 부르고 싶은 이름들이 많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부모님, 군대에서 내 첫 시들을 읽어주었던 지섭이 형, 설익은 시들을 읽어주느라 고생했을, 시를 쓰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준 근희 형, 시온이, 민규, 석화를 포함한 총문학연구회 사람들, 그리고 신엽이, 미라 누나, 윤하, 성우, 혜민이를 비롯한 ‘김신엽의 시모임(혹은 울, 모시모시, 시스루 등)’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문학과 시 쓰기가 가져다주는 어떤 온기가,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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