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사

그의 책은 유독 많이 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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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역사학자 ‘카’의 말을 인생 신조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김 교수인지라, 이는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책은 정말 유독 많이 써졌다.

이 기묘한 책이 어떻게 김 교수의 것이 되었냐 하면…………

그는 발굴을 했다. 안개와 미세먼지 그 사이에 있는 뿌옇고 축축한 흙을 머금은 책이었다. 김 교수는 답사현장에서 흙더미를 헤쳐가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발에 돌부리 엇비슷한 것이 채였다. 돌부리라 하기에는 모서리가 뭉툭하면서도 너무 예리했다. 발기된 남성의 그것 같다고 할까. 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이건 분명 책이었다. 형용하기는 어려운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기름칠이 벗겨지고 있는 그의 무릎을 굽혀, 그는 책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는 이 놀랍고도 대단하게 여겨질 발굴을 숨겼다. 그는 한국 역사학계의 최고 권위자이기에 이를 밝히기 전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권위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권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홀 린 듯이 김 교수를 따르게 했다. 그가 공기 중에 뱉는 말의 파동 하나하나는 고유의 떨림을 함축한 채 글로 쓰였다. 그리고 그 글은 가상의 거미줄에서 퍼 날라지며, 역사를 꿈꾸는 다른 후배 학자들에 의해 다시 쓰였다. 그렇다. 그는 역사인 것이다. 자신이 역사인 걸 김 교수도 아는 지라, 그는 이에 대해 자부심과 동시에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책임감 있는 자기 자신을 기특하게 생각하며, 김 교수는 자신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할 이 유물을 몰래 탐닉하기 시작했다. 글자를 어루만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갔다. 처음에는 다른 유물과 다를 바 없는 고대 기록일 뿐이었다.

* * *

‘설(薛)은 광인이었다. 그는 촌락(村落) 의 추앙받는 촌장이었지만 어느새 광인이 된 것이다. 이는 마을의 개구리들이 달이 차올라 구름에 걸린 후 점점 자취를 감추는 순간까지 울었던 만큼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말이 많았다. 그 말로 그는 일가를 이루었지만 그 말로 패가망신했다. 옆 촌락 촌장 송(松)과의 다툼이 화근이었다. 촌락의 아이가 금을 넘어오자, 송이 화를 내며 소를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설은 그 아이를 대변했다. 송은 설의 날름거리는 혀가 마음에 안 들었다. 송은 당장 설의 혀를 잡고 옆에 차고 있던 칼로 설의 혀를 베었다. 선혈이 낭자했다. 신기하게도, 설의 혀는 떨어져 나가도 움직였다. 온 촌락의 사람들이 금을 가운데 두고 구경을 했다. 구경거리였다. 그 혀 조각은 소 발굽을 닮았다. 울음이 차올랐다. 설에게 혀란 그의 육체의 일부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광인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주 말을 했다. 하지만 말에 옳은 구석은 없었다…………………………………….’

* * *

그는 책의 표지에 생채기가 날세라, 조심스레 책을 덮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유물은 아닌 듯하다고. 하지만 그 옛-날 느낌의 설화적 요소가 담겨 있는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이제는 은퇴를 바라보고 있는 그인지라, 그는 대단한 논문을 쓸 강박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이 기록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도 그에게는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기록이 강연을 할 때 다룰 소재거리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내일 강연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이 기록은 대단한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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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줄타기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를 대단하다고 합니다. 박수도 보내지요.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어찌 보면 그들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그 공연을 보는 건 그들의 비극적 상상을 자극하죠. 그래서 사람은 말을 잘해야 합니다. 아예 줄을 타지 않는 것도 방법이겠죠. 하지만 줄을 타기 시작했다면 한 순간 한 순간 한 발짝 한 발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비극적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게 하려면요. 그게 현실이 되지 않는 순간 당신의 꿈만 같았던 상상은 현실이 됩니다. 모든 사람의 박수와 환호를 받게 되는 거죠. 저는 말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 한 순간 조심해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말의 의미를 담아낸 기록을 며칠 전에 흙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설(薛)은 광인이었다. 그는 촌락(村落) 의 추앙받는 촌장이었지만 어느새 광인이 된 것이다. ------(중략)--------------그 혀 조각은 소 발굽을 닮았다. 울음이 차올랐다. 설에게 혀란 그의 육체의 일부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광인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주 말을 했다. 하지만 말에 옳은 구석은 없었다…………………………………….’

그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말에 대한 말을 해서 박수를 받는 그의 짜릿함은 손이 부딪칠 때마다 차올랐다. 그의 연륜이 허투가 아님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이제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보통 이 시간에는 다르면서도 결국엔 다 비슷한 질문들이 들어온다. 자신의 삶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내용. 그의 강연 내용을 확인하는 질문. 그것들이 주를 이룬다. 이렇게 진부한 질문세례에도, 그는 여전히 이 시간이 그리 불쾌하진 않다. 그가 이 강연의 주인공임을 확인받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상엔 답이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 공간, 그리고 이 시간 안에서 만큼은 그가 답이 된다. 김 교수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권위 있는 지식인의 말은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몇몇의 손바닥이 보인다. 둥그런 손바닥, 길쭉한 손바닥, 그 중에서도 기름을 바른 듯, 땀이 빛나는 손바닥을 택했다. 아마, 자신의 인생에 대한 조언을 구할 것이다. 저렇게 손바닥이 땀을 흘리듯, 그의 인생도 어줍지 않게 고전하고 있을 것이다.

“저기 왼쪽 분. 말씀해 보세요.”

역시. 한 번에 못 알아듣는다. 두리번거리고 있다.

“맞아요. 본인. 두리번거리고 있는 분.”

한 남성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김 교수의 비웃음이 무색하게도 환하게 웃는다.

“아. 저......저......는......보....보시다...시피......말을 더..더...더듬습니다. 제 아...아버지께서...서는 교....교수...님도...말...말을...더....더듬으셨....셨....다는......데......”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를 눈치 챘는지 그 남자는 말을 더 빠르게 이어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그럴수록 그의 발음은 더욱이 꼬여버린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그래서 그의 말을 끊었다.

“아 질문자님 아버지께서는 제가 말을 더듬고는 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지금은 이렇게 강연을 할 정도로 말을 잘 하냐는 이 말씀이신 거죠?”

“네...네..” 목이 늘어진 흰 티셔츠 사이로 빙긋 웃는 그 남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음...맞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 말을 못했어요. 그렇다고 말을 엄청 못하지는 않았고, 조금 더듬는 정도였던 것 같네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말을 더듬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까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린 기록 기억나십니까. 그 기록에서 설(薛)은 결국 미치광이가 됩니다. 그 똑똑한 지식인이 혀가 잘려 미쳐버리는 거죠. 그 혀는 설(薛)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부위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면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죠. 과연, 설(薛)은 노력을 했을까요? 즉, 저는 지금 ‘설(薛), 그 남자는 과연 남들 보는 앞에서 혀가 잘리는 수모를 당한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설(薛)이 노력을 했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노력을 했다면, 그의 변화에 대해 한 줄이라도 적혀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저는 이 기록을 보고 설(薛), 그 자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어요. 제가 안타까워한 건 바로 설(薛), 그 남자가 혀를 잘린 후 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그가, 그 똑똑한 사람이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 아쉬워하는 거죠. 누구나 자신만의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를 극복합니다. 극복한 후, 더 나은 사람,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에 반해 어떤 사람은 나약해서 자신을 동정하기만 합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에 너무나도 공감을 많이 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 지루한 감상 속에 빠져 사는 거죠. 저는 그래서 이 기록 속 설(薛)이 그 감상에 허우적대며,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저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말을 조금 더듬던 저 또한 여러분들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잘 안 되는 일이 있다면, 멈추지 말고 노력을 해보세요. 감상 속에 빠져만 살면 답이 없습니다.”

청중들을 보니, 모두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여기서 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는데,

“교..교수님...다...다른....사...사람...들...은...몰...모...를...수..수도...있지만..저는..노..노...력을...하긴...하...는데...요....그...그래...도...도...요즘...힘이...드...듭니다. 어...어떻게...극....극복...하셨....나...요?”

징징대는 꼴이라니. 저런 정신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참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는 소리만 해댄다.

“저는 항상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노력했습니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증명했죠. 그리고 과연 남들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이 노력일까요?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던 게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시간 관계상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이후에 몇 개의 시답지 않은 질문이 이어졌고 강연은 성공리에 끝났다. 강연을 녹화한 동영상은 줄을 타고 끈끈하게 퍼 날라졌다. 그리고 그 동영상을 봤다고 하는 어떤 청년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김솔’

‘교수님 동영상 잘 보았습니다. 교수님의 팬이 되었습니다. 이 강연을 꼭 현장에서 보고 싶은데 다음 강연 때도 같은 내용으로 해주실 수 있나요? 꼭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뿌듯했다. 사실 강연을 하는 입장에선 성공적인 레퍼토리를 다시 쓰는 건 기본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청년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그의 강연을 재탕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남은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그는 다음 강연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흙먼지가 아직 조금은 묻어 있는 기록을 가져가서 읽으면 끝인 것이다.

* * *

감색 정장을 갖춰 입고, 구두코를 말끔히 닦은 뒤 집을 나섰다. 그의 검정 세단의 헤드라이트는 김 교수의 눈빛처럼 빛났다. 어제 타이어를 갈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차도 잘 나갔고, 오늘따라 도로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 켠 라디오는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있었다. 모든 게 그의 기대에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예감이 좋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강단에 섰다. 그리고 저번 강연의 내용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러한 말의 의미를 담아낸 기록을 며칠 전에 흙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설(薛)은 광인이었다. 그는 촌락(村落) 의 추앙받는 촌장이었지만 어느새 광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략)--------------그 혀 조각은 말발굽을 닮았다. 말발굽을 닮았다.’

이완되어있다 못해 누워있던 김 교수의 혀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저릿저릿했다.

“말. 말. 아니...... 소, 소 발굽을 닮았다. 아니 말 발굽을 닮았다.”

혀는 움직이는 걸 포기한 듯했다. 항상 완만하게 굽어있었던 김 교수의 눈썹은 그 곡선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온 몸이 뜨거웠다가 차가워졌으며, 뜨거웠던 사람들 또한 차가워진 듯했다. 어떻게 이전 강연의 내용을 떠올려 대충 얼버무린 후, 김 교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집으로 직행했고, 침대에 쓰러졌다.

* * *

그는 중앙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묶인 채로. 그의 주위를 똑같이 생긴 사람 수 십명이 손을 잡고 돌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뿌옇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나도 행복한 것은 그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목에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은 빙빙 돌 뿐이었다.

* * *

아침잠이 없던 김 교수였지만, 그는 문득 일어나게 되었다. 꿈을 꿨다. 그의 팔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의 손은 땀으로 가득 찼고, 그의 주름 사이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몹시 기분 나쁜 꿈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으나, 불쾌한 내용인 건 분명하다. 마치 몸이 어떠한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책이 다시 쓰이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자신에게 노안이 찾아왔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역사에도 없는 것이다. 그는 그 기록을 다시읽기 시작했다.

‘설(薛)만 광인이었다. 그는 촌락(村落) 의 추앙받는 명예 촌장이었지만 어느새 광인이 된 것이다. 이는 마을의 닭들이 달이 차올라 구름에 걸린 후 점점 자취를 감추는 순간까지 울었던 만큼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말이 많았다. 그 말로 그는 일가를 이루었지만 그 말로 패가망신했다. 옆 촌락 촌장 솔(蟀)과의 다툼이 화근이었다. 촌락의 아이가 금을 넘어오자, 솔이 화를 냈다. 소를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설은 그 아이를 대변했다. 솔은 설의 날름대는 혀가 마음에 안 들었다. 솔은 당장 설의 혀를 잡고 옆에 차고 있던 칼로 설의 혀를 베었다. 선혈은 낭자했다. 신기하게도, 설의 혀는 떨어져 나가도 움직였다. 온 촌락의 사람들이 금을 가운데 두고 구경을 했다. 구경거리였다. 그 혓 조각은 개 발굽을 닮았었다. 울음이 차올랐다. 설에게 혀란 그의 육체의 일부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광인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주 말을 했다. 하지만 말에 옳은 구석은 없었다………………….’

분명히 달랐다. 내용이 달라졌다. 길이도 무언가 달라진 듯했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럴 리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 김 교수는 주름진 손가락을 타닥거리며 검색을 했다. 없다.

‘마술의 기록’

‘바뀌는 기록’

‘변화하는 기록’

‘수정되는 기록’

‘마법의 기록’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연관 검색어를 동원했지만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라는 같은 화면만 나타났다. 이제 김 교수는 자신의 누적된 피로가 그 까닭일 거라고 믿어보려 했다. 애꿎은 눈자위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지압했다. 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3통, 강연기획자로부터의 전화. 문자메시지 1통, 그의 제자 중 하나로부터의 문자. 항상 흐름이 끊기는 법이 없었던 그의 강연을 보아온 이들로부터의 연락이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푹 쉬십시오.’

그리고 이메일 1통. 그 청년이었다. 김솔.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강연 잘 보았습니다. 바라던 강연이었으나,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연세가 연세인 듯해서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동영상 때 들었던 기록의 내용과 어제 강연 때 말씀해주신 걸 비교해보면 다소 달라진 듯한데, 혹시 다음 강연 때는 제대로 다뤄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교수님의 팬이라 아쉬워서 그럽니다. 다음 강연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푹 쉬십시오. 김솔.’

아마 김 교수는 이 때 이를 무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그의 마지막을 노망으로 장식하고 싶진 않았다. ‘다음 강연을 성공시켜 박수를 받으리라. 그리고 그를 동경하는 청년을 만족시키리라.’ 이렇게 김 교수는 절치부심했다. 그는 기록을 보았다. 노력하면 그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그를 움직였던 오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 * *

그는 골목대장을 꿈꾸었었다. 막대기를 쥐고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고 싶었다. 아이들을 거느리고 개울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고 싶었던 것이 그의 다부진 야망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목소리는 너무 작았으며, 발음이 약간 샜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은 목소리의 떨림이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말을 더듬거리는 것이 어린 김 교수의 일상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1950년대의 한여름이었다. 전 골목대장의 전학으로 그에게 기회가 왔던 것이다.

“내 거야. 내가 먼저 봤어.”

“아냐. 주운 사람이 임자지.”

이렇게 다른 아이들이 실랑이 하는 사이, 어린 그는 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아래 떨어진 매미 허물을 하나 둘 줍고 있었다.

“토끼야, 토끼야, 산 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면 무엇을 먹고 사느냐.”

“야야. 노래 그만 부르고 이리로 와봐. 대장이 갔어.”

“그럼 우리 이제 대장 없어?”

“허튼 소리하지 말고. 대장 뽑으면 되지.”

“대장 어떻게 뽑을까?” 입 주변에 난 버짐을 벅벅 긁으며 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 거수하자.” 이 말이 들리자, 어린 김 교수는 빨리 아이들 무리 저 끝으로 총총 뛰어갔다.

“지금?”

“나 할래. 우리 집 방앗간 한다. 다들 알지? 그리고 메뚜기는 내가 가장 잘 잡는다.”

“나는 진수가 나은 거 같은데. 진수가 팔씨름 제일 잘하잖아.”

집이 방앗간도 아니고, 팔씨름 꼴찌에다, 말도 못하는 어린 김 교수는 골목대장 후보들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때 나서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어린 김 교수의 당찬 말은 성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목을 탔고 목이 늘어진 흰 메리야스를 뚫은 후, 드디어 시작되었다.

“나. 나……나 하면 안 되는가? 아니 안 될까?”

“병신새끼.”

그렇게 김 교수의 생애 첫 출마는 실패했다. 이후, 그는 방문을 잠그고 방 안에 들어 앉아 울었다. 마침 김 교수의 아버지가 두 달 후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어린 김 교수는 집에 틀어박혀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서 웅변연습을 했다. 일어난 뒤 웅변. 변을 본 뒤 웅변. 밥을 먹은 뒤 웅변. 그게 그의 일상이었고 어느새 말 잘하는 것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가장 처음 이 변화를 알아챈 건 그의 부모님이다. 더 이상 “안...안...녕히....주...무..셨..어요?” 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는 더 이상 머뭇대지 않았다. 변화는 비단 유창한 아침 인사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의 더듬대는 말이 걷히자, 그가 활개 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사한 지역의 학교에서 그는 반장선거에 출마했고 당당히 반장의 자리를 차지했다. 아이들은 그를 충실하게 따랐으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믿곤 했다. 그 뒤로 그는 아주 부드럽고 유유하게 교수로, 가장 듣고 싶은 강연 연사 1위로 흘러갔다.

* * *

가장 듣고 싶은 강연 연사 1위의 김 교수는 강연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 계속해서 바뀌는 이 기록을 어떻게 해야 할까. 동영상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외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학자인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는 변화하는 기록 그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한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기억력이 감퇴한 지 오래라는 것이다. 동영상을 통째로 외우기란 불가능하다. 씁쓸한 현실에 부딪히자, 그는 목이 말라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는 물을 찾으려 일어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주변에 치이는, 마시다 말고 내려놓은 물병을 찾는다. 물을 한 모금 입에 문 채, 다시 궁리를 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강연에서 기록이 다시 쓰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는 다소 위험한 방법이다.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변화하는 기록에 대해 이야기하며, 기록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써버릴 수밖에. 그리고 편하게 바뀐 기록을 읊는 것이다. 위험한 방법이지만 그래도 그는 그의 권위를 믿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믿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번째 방법을 택한 뒤, 그는 강연 전까지 기록을 매일 확인했다. 하루에 한 번씩 바뀌는 듯했다. 여느 날처럼 그는 기록을 확인하다가 소파 위에서 깜빡 잠에 들었다.

* * *

그는 중앙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묶인 채로. 익숙한 멜로디가 그의 고막을 두드렸다. ‘토끼야. 토끼야. 산 속의 토끼야.’ 가사가 반복됨에 따라, 그의 주위를 도는 사람들의 모습은 점점 또렷해졌다. 사람들 사이로, 때 구정물이 흘러, 누렇게 변한 메리야스를 입은 어린 김 교수가 보였다. 그는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목에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은 그의 주위를 빙빙 돌 뿐이었다.

* * *

식은땀을 흘리던 김 교수는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 날이 온 것이다. 무언가 불쾌한 꿈 내용을 더듬는 대신, 그는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어제와 조금 달라진 게 다였다. 설(薛)은 명예 부 촌장이었고 소가 울고 있었다. 이를 한번 쭉 읽어본 뒤 그는 숨을 가다듬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말더듬이 어린이가 속에서 외치었다.

그는 강연장으로 향했고 계단을 올라갔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기대가 섞인.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볼 맛은 날 관객들이다.

“말은 줄타기와 같습니다. ……………(중략)…………. 저는 이러한 말의 의미를 담아낸 기록을 며칠 전에 흙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 읽기 전에 먼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제가 발견한 최고의 유물이라는 겁니다. 말의 의미를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죠. 말은 바뀌기도 한다는. 바로 그 속성. 이 기록은 이전 강연의 기록과 같지만 다릅니다. 다시 쓰이는 것이죠. 내용이 바뀐다는 겁니다. 제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역사학자 ‘카’의 말에 더욱이 더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 기록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김 교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기록을 낭독하려 했다. 하지만 그 기록은 변하고 있었다. 글자들은 꿈틀대며 각자 형상을 비틀고 있었다. 어떤 글자들은 흔적도 없이 흰 종이 속으로 자취를 감추려 했다. 몇몇의 글자들은 새로운 획을 흰 종이 틈으로 들이 밀고 있었다. 분명 지금은 바뀔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는 바뀌면 안 되는 것이다. 김 교수가 잠을 설쳐 가며 준비한 바로 이 시간은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글자들은 바뀌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지금 바뀐다고 해서 김 교수가 뭐라고 할 말은 없다. 애초에 그들은 김 교수와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뀌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김 교수는 비틀대는 글자의 획들을 잡고 싶었지만 도리어 잡힌 것은 그의 입술이었다. 그의 입은 멈추었다. 그의 귓 속이 웅웅대기 시작했다.

“병신 새끼.”

“병신 새끼.”

“병신 새끼.”

그가 들고 있는 기록이 하는 말인지.

그가 보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지.

하얀 메리야스를 입은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입이 멈추었듯, 그는 그 순간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김 교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일까. 김 교수가 멈추어버렸다.

정적이 흐른 일분 뒤 사람들은 각자 휴대폰을 꺼내 동상같이 변해버린 김 교수를 찍기 시작했다.

정적이 흐른 오분 뒤,

사람들은 각자 짐을 챙겨 나갔다.

정적이 흐른 십분 뒤,

김 교수는 실신으로 들것에 실려 나갔다.

정적이 흐른 하루 뒤,

사람들이 입수한 김 교수의 기록은 백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적이 흐른 오일 뒤,

사람들은 김 교수가 노망났다고 말했다.

정적이 흐른 십일 뒤,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김 교수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김 교수는 광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동료 학자들 및 후학들뿐만이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추앙받는 학자였지만 어느 새 광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최근 강연에서 이상 행동을 많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그가 하지 않던, 말 더듬는 행동 등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 강연 현장에 있던 관계자 및 청중들은 그가 어느 기록에 대해 자꾸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 기록은 백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강연장에서 실신한 후, 그는 자주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에 옳은 구석이란 없다고 합니다. 이상 기자 김송이었습니다.”

정적이 흐른 일 세기 뒤.

잘나가는 어떤 고고학자가 안개와 미세먼지 그 사이에 있는 뿌옇고 축축한 흙을 머금은 책을 발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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