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윤영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서울대에 오랫동안 몸담고 학생들과 함께 지내왔지만, 사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의 그 복잡한 심경의 무게를 짐작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냥 주변 어떤 노교수의 소회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평소 얼굴이 어두웠던 A라는 학생, 그의 고민의 근원은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젊었을 때 고시에 떨어진 분인데, 자기에게 고시를 하라고 강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도 마치 고등학생 때처럼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했다네요. 자신의 대리만족을 위해 자녀의 삶을 틀어쥡니다. 그래서 독립적인 사고 능력과 의지를 소진시켜 주도적인 삶을 힘들게 만들어버리지요. 장래에 하고 싶은 게 별로 없거나,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것을 할 용기가 없습니다. 결국, 불안감에 쫓겨 남들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길을 따라갑니다.

어느 날, 학생 B가 말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서울대 들어와서 망해버렸어요.” “왜?” “서울대 오기 전에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전교 1등을 해왔고 그래서 인정받았고, 그게 제 삶의 의미였어요. 그런데 여기는 나보다 잘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저는 정말 초라해져 버렸고 삶의 의미도 잃어버렸어요.” 내가 말했지요. “삶엔 하나의 잣대만 있는 게 아닐 텐데, 꼭 다른 사람들의 잣대로만 너를 잴 필요가 있을까? 용기가 필요하지만, 네 자신만의 잣대를 갖고 네가 잘하는 것을 찾아내 집중적으로 키워보면 어때?”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항상 열심히 듣던 여학생 C는 집안이 어려웠습니다. 학기 중에도 알바를 두 개씩 했지요. 한번은 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더니, 알바 두 개에 더해 일식당에서 웨이트리스를 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83동을 나서다가 건물 입구 오른쪽 외진 곳에서 혼자 담배를 피고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 언뜻 보았던 너무나 삭막했던 그의 얼굴 표정에 한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기성세대들은 선진국 문턱에 왔다면서도, 이런 아이들이 마음껏 공부하게 못 해줄까.

아무튼 이들 모두 졸업했습니다. A와 B는 소식이 끊겨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네요. C는 어느 날 뜬금없이 연락해와 첫 월급 받았다며 저녁을 샀습니다. 원했던 새 직장에 들어가 만족하고 잘 지낸다며 밝은 얼굴로 수다를 떨었습니다. 아주 기분 좋은 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관악산을 떠나세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불안한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자책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여러분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이제 학창시절의 고뇌들을 뒤로하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마음속의 한 줄기 희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 마십시오. 인생은 백 미터 단거리가 아니라 42킬로 마라톤입니다. 길게 보십시오. 지금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도, 그 희망은 이뤄질 것입니다. 처음엔 미숙하고 어설플지 몰라도 5년, 10년, 그리고 20년이 지나면서 구체화되며 이뤄지는 것들을, 나는 지켜봐왔습니다,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가 너무 강력하고, 모순적이고, 적대적이어서, 모든 것이 너무 막막해 보여도, 쉽게 항복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개인적 존재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자존심의 핵심은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여러분의 그 일을 통해 이웃과 세상 사람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게 하겠다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여러분들의 역량을 무한히 키워나갈 것입니다. 최소한 스스로 나이 들어 부패하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가 될 것입니다. 방부제 없이 살다 망가져버린 여러분 선배들의 모습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들이 공부했던 중앙도서관 말입니다. 그 도서관에 7년 전 어느 고졸 학력의 주유소 알바 청년이 100만 원을 기부했었습니다. “학교와 지역사회와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 그것을 갚고 싶다”면서. 깊은 고심 끝에 기부한 돈은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은” 액수였답니다. 그는 도서관에 보낸 편지 말미에서 그렇게 외치더군요. “언제나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고 비상하십시오. 당신들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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