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이들에게]서로의 흔적
[떠나는 이들에게]서로의 흔적
  • 대학신문
  • 승인 2019.02.24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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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사회학과 14)

강한

사회학과.14

이 글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은 후 처음 했던 생각은, 계절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재가 흔해서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접근에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마치 나만 쏙 빼놓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무심하게 오고 가는 것들이 있는 것 같은데, 계절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졸업자 역시 ‘자연스러운’ 통과의례를 거치며 저를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타인일 뿐입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저는 언제나 그 점이 속상했습니다.

물론, 졸업이 슬픈 일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이의 끝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삶이 진정으로 인간적이려면 그것이 ‘이야기’여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삶과 세상을 겪어내는 존재이지만, 또한 주어진 세상 속에서 용감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인간의 역사를 비로소 성립시키는 ‘행위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이곳에서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걸음을 통해 함께 어떤 ‘역사’를 만든 것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가 앞으로도 같은 세상을 겪어낼 ‘인간 공동체’임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의 졸업으로 우리의 사이는 겨울과도 같이 건조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제가 슬픈 이유는 세상이, 대학이 더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어떤 불길한 느낌 때문인 듯합니다. 우리는 역사가 소거된 시대에 태어나 역사 없는 세계에 익숙해지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가르침은 참으로 쓸모 있고 합당해 마지않습니다. 같은 대학을 다닌 우리는 이미 굉장히 다른 삶, 다른 ‘이야기’를 살아온 존재들입니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장 지금 제가 글을 쓰는 생경한 방식이 당신에게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점, 즉 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펼쳐지는 당신의 이야기야말로 존중하고 또 존경합니다. 의례적인 졸업 인사란 낯선 타자에 대한 그 존중을 마지막으로 표하는 것이겠지요. 축하드립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 이야기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졸업이 가까워지고 본격적으로 진로 고민을 하게 되면서 이 공간을 마주하는 태도와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 들이마시는 관악산의 겨울 공기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이, 오늘 저의 하루를 만들어준 이들이 불과 몇 년 후에는 제 세계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최근에 서점에서 같은 반 동기를 마주쳤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나눠본 지도 한참 된 친구였는데, 반갑게 인사해오니까 저도 많이 반가웠어요. 각자의 이야기가 이미 한참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서로 잘 알고 있을 만큼 그동안 우리가 성숙해졌을 텐데도 말이에요.

우리가 으레 상대방의 졸업을 축하할 때 그것을 순전히 의례적으로 남지 않게 만드는 것도 그런 소소한 감정의 반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아무리 삶이 복잡하고 고단해도 끝끝내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으려 하는 어떤 진정성의 파편 말이지요. 당신의 졸업으로 인해 우리의 이야기가 달라지고 또 갈라지게 된다는 슬픈 사실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기에 당연한 것, 주어진 ‘조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우리가 4년의 짧은 시간 동안 잠시 같은 공간을 점유했다는 단지 그 소소한 사실 하나로 인해, 각자의 이야기에 서로의 흔적이 조금은 각인됐으리라고 기대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흔적들이 언젠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는 촉매가, 계절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도 기어이 완결되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낙관까지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희망을 갖고 용기를 내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날이 아직 춥습니다. 진심으로, 졸업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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