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국어교육과 석사졸업)

김범진
국어교육과 석사졸업

대개 글을 쓰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내게 졸업 소감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갈 재능은 없어서 먼저 졸업하신 분들은 어떤 글을 썼나 찾아봤다. 좀 살펴보니, 관악에서 몇 년 지내다 보면 몇 가지씩들 얻게 되는 것 같았다. 자신감이라든가 지혜라든가, 내게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뭘 말할까 고민해봤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조그만 졸업장을 얻기 위한 투쟁기고, 두 번째는 내가 학교에서 마신 커피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에 대한 재미없는 얘기들 말고, 오늘은 내가 ‘커피 권하는 사회’에서 만난 커피들 얘기를 하려고 한다.

◇파스쿠찌(오르조)=사실 보리를 갈아 내린 오르조는 커피가 아니다. 카페인도 없고 달콤해서, 다시 새내기가 된 1학기에 마시기 좋았다. 그때 나는 카페인이 필요 없었으니까. 사주를 보니 나는 공부할 운명이 아니라는데, 이때 생각만 해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때도 도서관엔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겠지만 그런 흑백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하루하루가 총천연색 봄날의 릴레이였다.

◇할리스(바닐라 딜라이트)=2학기가 되고 이제는 나도 좀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학교에서 달을 보기 시작했다. 뭔가 활자는 많이 보는 것 같은데, 머리에 남는 흔적은 없는 것 같은 때였다. “배우나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다”는 공자님 말씀은 역시 틀린 게 없다. 이제는 1학기처럼 마냥 달진 않고 조금씩 씁쓸하긴 했는데, 그래도 바닐라 파우더가 뿌려져 있어 아직은 부드럽게 달쭉했다.

◇투썸플레이스(콜드브루)=3학기가 되고 논문을 준비하게 됐다. 의자에만 앉아 있다 보니 살도 좀 붙는 것 같아서 검은색 커피에 손이 갔다. 이제 뜨거운 커피를 머그잔에 내려 담는 사치를 부릴 여유는 없었다. “공부는 무지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는 윌 듀란트의 말이 맞다면, 나는 이제 ‘진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조금이라도 칠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어째 흰 여백이 차지하는 영역은 점점 자라고 있었다.

◇두레미담(아메리카노)=4학기가 되면서 이제 커피는 내게 ‘기호식품’이라기보다는 ‘전투식량’에 가까웠다. 간단한 한 줄 선언의 사용을 승인받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 이 ‘전투식량’은 늘 함께였다. 그사이 책상엔 내가 커피잔으로 찍어 누른 얼룩이 생겼고,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빈 잔이어서 이제는 이런 글을 쓴다.

요즘은, 벌써 서른이 코앞인데 얼른 취업이나 하라는 소리에 움찔거리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교육은 최상의 노후 대비책”이라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혜안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를 바라면서 박사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커피 권하는 사회를 간신히 나오고 나서, 커피 ‘더 많이, 아주 많이’ 권하는 사회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미처 쓰지 못한 커피에 대한 후기는 좀 더 많은 커피를 만나보고, 다음 소감문에 마저 쓰겠다는 기약을 남기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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