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수중고고학의 베일을 벗기다

드넓은 해저에 잠들어 있는 유물을 깨우는 수중고고학이 요즘 점차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수중고고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낯설게 여긴다. 아직 국내에선 수중고고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대학이 없으며 이 분야를 연구하는 기관조차도 단 한 곳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수중고고학 수준은 국제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불과 40여 년 전에 시작된 한국의 수중고고학은 어떻게 지금의 수준에 이르게 됐을까. 지난달 25일 방문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생생한 수중고고학 연구 현장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바다라는 환경이 수중고고학에 새긴 특징

수중고고학은 고고학의 한 분류로, 기본적인 개념에서 육상고고학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수중고고학은 여러 지점에서 육상고고학과 구별된다. 수중발굴은 파도와 물살 등에 따라 조사 가능성이 제한되기도 하고, 해저에서 조사하기 때문에 사망사고가 발생할 위험도 크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노경정 연구원은 “수중 조사와 발굴 자체도 중요하지만 최우선은 안전”이라고 강조했다.

발굴의 시급성과 현장 보존의 관점에서도 수중고고학은 육상고고학과 차이점을 보인다. 노경정 연구원은 발굴도 기본적으론 파괴 행위라며 “최근 육상에선 발굴 현장을 보존해 미래에 정밀한 조사가 가능해졌을 때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저에선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다. 노 연구원은 “해양 생물, 해류, 수중 공사 등의 이유로 유물이 물속에서 계속 훼손돼 긴급하게 유물을 발굴해야 하는 경우가 잦다”고 지적했다. 특히 해저에서 공사가 이뤄지는 경우 매장된 유물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유물의 존재 자체를 알아내기 어려워 훼손 가능성이 높다.

노경정 연구원은 "보존처리가 끝난 십이동파도선의 발굴 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복원 과정을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육상고고학자와 비교했을 때 수중고고학자에겐 추가적인 능력과 연구 과정이 요구된다. 해저에서 조사와 발굴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수중고고학자는 고고학자의 기본 소양을 수중에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발굴 현장 중 거센 물살로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수중고고학자는 해저에서 유물의 실제 모습을 도면으로 옮겨 그린다. 이를 실측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습식 도면을 이용해 연필과 지우개로 유물의 발굴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또한 수중 발굴 과정에선 펌프 장비로 해저의 흙을 배 위에 배출하는 제토 작업을 거친 후 걷어낸 흙을 재확인해 드러나지 않은 유물을 찾는다. 노 연구원은 “이는 동전과 같이 물속에서 놓치기 쉬운 유물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수중고고학이 걸어온 길

국내의 수중고고학은 14세기 침몰선인 신안선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1975년, 신안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려 올라왔고, 어부는 이를 신고했다. 신고받은 해역에 잠수부를 파견해 조사한 결과, 수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홍보과 박예리 연구원은 “이를 계기로 바다에도 묻힌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됐다”고 말했다.

신안선 발굴 당시엔 수중고고학에 대한 경험과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해군 해난구조대의 협조를 받아 어렵게 발굴을 진행했다. 노경정 연구원은 “당시 발굴 해역이 시야 확보도 어렵고 물살도 거센 곳이라 발굴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며 “해군 잠수사가 유물을 인양하며 봤던 장면을 구두로 전해 들은 고고학자들이 육지에서 실측했다”고 말했다.

신안선은 총 9년에 걸쳐 발굴됐는데, 조사 후반부에 접어들며 점차 선체 파편이 발굴됐다. 인양한 유물과 선체 파편이 증가하자 이를 보존 처리할 공간이 필요했다. 발굴한 유물을 장거리 운송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히 신안과 가장 가까운 목포에 부지가 확보됐다. 노 연구원은 “이때 목포 보존처리소가 설립됐고, 이는 현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별관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처리 과정을 마치고 유물을 전시해야 할 시점이 되자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신안선 발굴부터 지금까지 연구소는 국내 수중고고학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수중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해군 해난구조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연구소의 부단한 노력을 바탕으로 상황은 점차 개선됐다. 노 연구원은 “2003년도에 진행된 군산 십이동파도선 발굴부터는 해군의 도움 없이 온전히 연구소 자체적으로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선 수중 발굴 역량을 기르기 위해 직원들에게 잠수를 가르치기도 했다. 발굴과 인양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확보하고 씨뮤즈호(수중문화재탐사선)와 누리안호(수중발굴전용선)라는 수중발굴선도 건조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수중고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조사가 다수 진행됐다.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어부의 통발에 걸린 주꾸미가 고려청자를 붙들고 올라오며 25,000여 점의 고려청자를 실은 태안선 발굴이 시작됐다. 또한 마도해역에서 마도 1, 2, 3호선이 연이어 발굴됐다. 이 때의 경험이 국내 수중고고학 기술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된다. 노 연구원은 “이 외에도 완도선이나 진도선 등을 발굴했다”며 “올해는 제주 신창리와 진도 해역에 발굴을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해저 유물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해저에서 발굴한 유물을 인양하는 것이 수중고고학의 끝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속에서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유물도 수면 위로 올라온 상태 그대로 보관하면 크게 훼손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수중발굴로 얻게 된 유물들은 반드시 보존처리 해야 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 윤용희 연구원은 “일반적으로 나무가 강도도 약하고 쉽게 썩는다고 생각해 고려시대의 나무 조각이 지금까지 바다 속에 남아있다고 하면 신기해한다”고 말했다. 박예리 연구원은 “물과 바다 속 환경이 완충적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침몰 후 조류의 흐름에 의해 배 위를 메운 펄이 유물을 보호한다. 펄 안에 갇힌 유물은 산소가 차단돼 썩지 않으며 해양생물의 영향도 비교적 적게 받을 수 있다. 물 또한 유물의 형태 보존에 큰 역할을 한다. 윤 연구원은 “목재 안에 혐기성 세균이 침투해 목재 구조가 많이 망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재 안에 물이 들어가 나무의 세포 대신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수면 위로 올라온 직후에는 유물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만, 유물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내부의 물이 마르며 형태가 변형될 수 있다. 윤 연구원은 “이런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물을 대신할 PEG(폴리에틸렌글리콜) 약품을 집어넣어 형태를 유지하는 경화처리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때 염분에 포함된 염화 이온이 건조 중 결정화돼 유물을 망가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제거하는 탈염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민물에 목조 유물을 담가두면 농도 차에 의한 삼투압 반응을 통해 자연적으로 염화 이온이 배출된다.

국립해양연구소 별관에서 운영하는 탈염장의 모습이다. 현재 안산 대부도선과 영흥도선 및 닻들이 탈염 처리 중이다.

그러나 PEG 처리를 거치면 목재 표면이 검게 변해 표면에 적힌 글씨를 가릴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공동결건조 과정을 거쳐 목재 표면을 하얗게 만든다. 윤 연구원은 “PEG 처리를 40퍼센트 정도만 한 유물을 영하 40도에서 급속으로 얼리고 이를 진공동결건조기에서 건조하면 얼음이 승화되면서 목재 표면이 밝아진다”며 그 원리를 설명했다.

유물에 적힌 글씨가 손상되거나 분간이 어려운 경우엔 적외선 촬영을 진행한다. 윤 연구원은 “보통 미술 분야에서 사용되는 적외선 촬영을 유물에 사용하면 이미 지워져 눈으론 분간할 수 없는 글씨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유물에 남은 글씨는 해당 유물뿐 아니라 발견된 선박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노경정 연구원은 “마도선 등에서 발견된 목간*을 보존처리해 적혀 있던 글씨를 해석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그 결과 마도 3호선이 출항했던 시기의 고려사회가 무신정권 시기이며 당시 최고 권력자가 ‘김준’이었다는 사실을 실제 유물에서 최초로 확인하기도 했다.

목간뿐 아니라 신안선에서 발견된 청동저울추와 목간에 적힌 글씨도 배의 성격 규명에 도움을 줬다. 청동저울추에 적힌 경원(현 지명은 닝보)과 목간에 적힌 동복사(도호쿠사)라는 지명을 통해 신안선이 중국에서 출항해 일본으로 향하던 중 고려 해역에서 침몰한 선박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처럼 오늘날 수중발굴을 통해 발견되는 유물들은 과거의 한 지점에 침몰해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박 연구원은 “현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바다의 비밀, 9세기 아랍 난파선’ 전시에선 아시아의 수중발굴 성과를 국내에 소개하고자 했다”며 “9세기에 아시아의 바닷길을 통해 어떤 교류가 이뤄졌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해당 전시에선 수중발굴로 복원한 여러 유물을 통해 중국, 아랍, 신라가 공유했던 문화를 보여준다. 각국에서 유행했던 문화적 특징도 엿볼 수 있다.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발굴 과정에 임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예리 연구원은 “오늘날 수중발굴로 발견되는 유물은 지금이야 문화재로 인식하지만 결국 당시 해난사고의 결과”라고 언급했다. 노경정 연구원도 “그 때문에 조사하는 순간마다 항상 수중발굴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불행이었다는 점을 마음속에 새겨두고자 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국내 해역 중 아직 조사되지 않은 지역은 쉬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노 연구원은 “더 많은 해역을 조사하며 수중고고학이 계속 성장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저에 묻힌 침몰선이란 타임캡슐을 여는 수중고고학자들은 오늘도 발로 뛰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가려진 역사를 수면 위로 건져 올리는 수중고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대중들의 더 많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한 순간이다.

*목간: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죽간과 함께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목편. 여기서는 오늘날 택배 운송장의 기능을 하는 나무 조각을 뜻한다. 먹으로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냈는지가 기록돼 있다.

사진: 유수진 기자 berry832@snu.kr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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