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서평 |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부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대중영합주의’, 특히 ‘나라 망치는 포퓰리즘’ 같이 상대방의 정책을 비방하는 공격적 맥락으로 쓰인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정의 방식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하다. 포퓰리즘은 인민, 대중, 민중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포풀루스’(Populus)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은 포퓰리즘을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포퓰리즘은 이 정의와 다르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영국에서 브렉시트 국민 투표가 실시되는 등 2016년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포퓰리즘 양상이 관측된 해였다. 이후 포퓰리즘 열기는 독일, 터키, 필리핀 등 세계 각지를 가리지 않고 퍼지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포퓰리즘을 다루는 저작이 크게 늘었다. 그중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와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두 권의 책은 포퓰리즘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어떻게 이에 대응할지 알려줌으로써 포퓰리즘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포퓰리스트 = 반다원주의 + 반엘리트주의

학계는 포퓰리즘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포퓰리즘 자체는 매우 오래된 연구 주제지만, 1967년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누구나 포퓰리즘에 대해 말하지만 아무도 뭔지 정의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다. 누구나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섬세한 개념 정의를 통해 포퓰리즘이 작금의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세히 분석한 경우는 흔치 않다. 독일 출신으로 정치이론과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얀 베르너 뮐러는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통해 포퓰리스트 개념 명료화에 도전한다.

뮐러는 포퓰리즘을 ‘정치에 관한 특정한 도덕적 상상’이라 정의한다. 포퓰리스트는 현실 정치를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이, 부패하거나 도덕성이 없는 엘리트에 대항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신들만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의 “우리가 국민이다. 너희는 누구냐?”라는 일갈이나 영국 브렉시트 찬성파 나이절 패러지의 “브렉시트 결정은 진정한 국민의 승리”라는 말은 이런 인식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가 다원성이라 할 때, 포퓰리즘은 자연스럽게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제가 탄생한 이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라진 적 없는 ‘대의민주주의의 그림자’다. 이들은 ‘국민’이 인식하고 소망하는, 예컨대 트럼프가 말하는 ‘위대한 미국 만들기’와 같은 단일한 공동선이 존재하며 자신들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국민’이 복수형일 수 있다”는 명제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이 국민 전체를 대변하며, 대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는 ‘진정한 미국인’ ‘터키의 애국자’ 등의 용어를 자신의 도덕적 이상과 결합해 규정한다.

포퓰리즘은 단순히 다수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아부와 다르다. 포퓰리스트는 설사 자기 세력이 실제 다수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국민’ 다수가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티파티 회원들이 다수표를 얻은 대통령을 “다수의 뜻을 거슬러 통치하고 있다”며 비판한 것에서 보듯, 이들은 야당 시절엔 엘리트가 국민을 배반하고자 만든 ‘잘못된 정치 시스템’에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거꾸로, 집권한 포퓰리스트는 야당 시절 자신이 거세게 비판한 그 시스템을 통해서 ‘국민’의 의지를 실행한다. 이는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가 포퓰리즘이란 단어를 이론적으로 정의하려고 한 시도에 가깝다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좀 더 생생한 문체를 통해 현실 정치를 묘사한다. 두 사람은 칠레, 베네수엘라 등의 국가와 미국의 사례를 분석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아웃사이더 포퓰리스트’에 의해 위협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아웃사이더 포퓰리스트는 정적이나 언론인을 말로 비난하기를 즐긴다. 이때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반역자’라거나 ‘배신자’ 같은 자극적인 단어가 동원된다. 기존 정치인이나 정당은 이들의 자극적인 언사와 대중적 인기에 압도당해 무력해진다. 심지어 일부는 극단주의자와 연합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른다.

민주주의는 규범에 의지한다

그렇다면 포퓰리스트가 국가 실권을 거머쥐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두 책의 저자들은 포퓰리스트가 충분한 권력을 확보하고 나면 민주적 절차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취향 또는 이상대로 국가를 재창조한다고 지적한다. 뮐러에 따르면,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 심지어 정당까지 ‘비(非)국민’으로 규정해 탄압하고, 사법부와 정보기관 등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개조한다. 터키나 폴란드에서 그랬듯 헌법 개정이 이들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 소수자 보호 원칙은 헌법 개정 과정에서 심각하게 침해된다. 레비츠키와 지블렛 역시 포퓰리스트는 권력을 획득할수록 말을 넘어 실제 행동에 착수한다고 말한다. 선거는 여전히 시행되고 신문은 발행되나, 포퓰리즘 정권은 사법기관 같은 ‘심판’을 매수하고 헌법과 선거 제도를 바꿔 ‘운동장’을 기울인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던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은 부식되다 못해 어느 순간 붕괴한다.

뮐러는 1920년대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을 통해 현재까지도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의 언어’ 뒤에 숨어 권위주의로 전환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소개한다. 슈미트는 ‘동질적인 국민의 환호’를 올바른 민주주의로 여기고, ‘피통치자와 통치자의 통일성’을 대변할 수 있는 지도자의 필요성을 중시했다. 포퓰리스트는 슈미트의 이론에서 실마리를 얻어내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고 정치적 분열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되는 미국은 어떻게 권위주의로의 전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레비츠키와 지블렛은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미국 헌법이 우수해서 미국 민주주의가 유지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에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는 민주주의 관습과 규범이 견고했던 탓에 다른 국가처럼 민주주의가 붕괴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상호 관용이란 경쟁자를 하나의 올바른 시민으로 인정하는 규범을 일컫는다. 권력에 대한 도전이 과거에 당연히 반역으로 인식됐던 것에 반해, 미국의 민주주의는 정적 존재의 타당함을 인정하고 적과의 공존에 성공했다. 두 번째로 제도적 자제란 법을 집행하는 데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관습을 말한다. 제도적 자제의 반대말이 권력의 남용이란 점을 고려할 때 우린 자제의 개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록 합법적인 권한이라 할지라도 정치인은 주어진 권한을 무리하게 활용해 제도의 안정성을 흔들어선 안 된다. 미국에선 작게는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워싱턴의 선례를 따라 대통령 임기를 재선으로 제한하기로 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밀접히 연관돼 있고,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민주주의 규범이다. 그러나 사회 양극화가 커질 때 민주주의 규범은 무너진다. 인종 갈등, 경제 불평등 등으로 정치 참여자 간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이 심해지면, 민주주의를 일탈로부터 보호하는 ‘규범의 가드레일’이 약해진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흥미로운 통찰이 드러난다. 미국 연방 정부는 ‘1877년 타협’으로 남부에서 연방군을 철수했고, 동시에 흑인 시민권 박탈을 묵인해 인종 문제를 정치적 의제에서 배제했다. 남북전쟁으로 사라졌던 상호 관용은 남부 민주당원*과 북부 공화당 보수주의자 간 ‘흑인의 피를 대가로 한 타협’을 통하고 나서야 비로소 회복됐다. 이 때문에 흑인 시민권을 인정한 1965년 이후 민주화 흐름은 역설적으로 잠재했던 인종 갈등을 심화시켜 미국의 두 거대 정당을 양극화시켰다. 남부 백인 집단은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으며, 흑인과 진보주의자는 민주당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민주당 내 보수주의자, 공화당 내 진보주의자가 사라지며 정당 간 협력이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치의 양극화가 문화와 사회 양극화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2016년 설문 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의 49%, 민주당 지지자의 55%가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느낀다고 답했을 정도로 미국의 정당은 정치 이념뿐 아니라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적 성향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양당 지지자는 상대를 ‘진정한 미국인’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가 됐다. 트럼프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인물이다. 슈미트의 가르침을 따라, 트럼프는 반이민, 반세계화 정서를 부추기고 이민자와 무역 개방 없는 ‘진짜 미국’과 ‘가짜 미국’을 구분했다.

‘열린’ 민주주의를 향해

뮐러와 레비츠키·지블렛이 포퓰리즘에 접근한 방식은 다르지만, 포퓰리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선 비슷한 결론을 도출한다. 먼저 두 책 모두 민주적 대표성을 강화할 방법을 요구한다. 뮐러는 포퓰리즘의 성공이 기존 정당과 정치인이 나를 대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회의감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뮐러의 비판은 유럽연합을 향한다. 유럽연합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헌법재판소처럼 민주적으로 선출되지 않은 기관에 과도한 힘을 실어줬고, 이것이 포퓰리스트에게 비판의 구실을 줬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체가 좀 더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방안을 찾아내야 함을 시사한다. 레비츠키와 지블렛 역시 정당을 민주주의의 문지기로 규정하며, 정당이 극단주의자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 정당은 극단주의자와의 연합을 거부하고, 사회 양극화를 완화해 유권자 간 지속적인 연대감을 부여해야 한다. 저자가 미국에서 점차 비중이 늘어가는 유색인종과 같은 소수자 집단과 기득권을 위협받는 백인 노동 계층을 아우를 ‘다민족 연대’ 형성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또한 두 책의 저자 모두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가 탄생한 이래 언제나 있었고, 포퓰리즘을 절멸시킬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샹탈 무페 같은 일부 정치학자는 포퓰리즘에 대응하기 위해 포퓰리스트의 행위를 거울삼아 똑같이 행동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뮐러와 레비츠키 모두 이 방법에 반대한다. 포퓰리스트에 맞서기 위해 또 하나의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위험하고 무가치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뮐러의 말대로 ‘우리 국민’(We the People)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열린 질문으로 남을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포퓰리스트가 ‘국민’의 개념을 제한하고 좁힐 때, 민주주의자는 더 포괄적인 민주주의로 맞서야 한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뮐러는 포퓰리스트가 법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한 그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여기고 소통할 필요를, 레비츠키는 서로 다른 계층 간 연대를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숱한 연대의 도전과 실패의 반복을 요구한다.

해외의 사례와 달리, 한국에서의 포퓰리즘은 아직 그 영향력이 기존 민주주의 시스템을 위협할 만큼 크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을 중심으로 점차 불안감과 불신 그리고 이에 따른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늘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 사회 역시 작년 예멘 난민 파동과 혜화역 시위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겪은 바 있다. 기존 정치 시스템이 당면한 사회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거나 되려 갈등을 키운다면, 포퓰리즘은 언제나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남부 민주당원: 미국 민주당 내부의 남부 출신 세력, 특히 노예제를 지지한 노예 소유주 출신을 일컫는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얀 베르너 뮐러

노시내 옮김

160쪽

마티

14,000원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렛 공저

박세연 옮김

352쪽

어크로스

16,800원

삽화: 홍해인 기자

hsea97@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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