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현

편집장

‘행복’이라는 단어만 보고 어떤 순간이 떠오른다면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피부로 느껴지는 행복의 기억은 삶을 아름답게 하며 지금의 고난을 이기고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양영순 작가의 웹툰 「덴마」에 등장하는 ‘지로’라는 캐릭터는 이런 명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약물 중독으로 세상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그가 다시 일어난 것도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보냈던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 덕분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너무나도 빨리 바래버리고 반대로 상처는 가슴속에 영원히 남는 것 같다. 가장 오래된 상처를 꼽으라면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행복했던 순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고등학교 때까지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내 하루는 불안과 걱정으로 점철돼 있었다. 이따금 행복감을 느끼긴 했으나 그 순간의 공기와 촉감은 금세 슬픔에 잠식돼 버리고, 흘러가 버린 기억의 일부로서 ‘그 공간에서 내가 행복했다’는 사실만이 명제로 남았다. 그래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행복감을 붙잡고자 기쁨을 느낄 때마다 그곳의 풍경과 감정, 느낌 따위를 가능한 한 생생하게 기록해두려 했다.

문제는 좋은 의도가 그대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데 있다. 좋은 일, 기쁜 일을 겪으면 만족감을 즐기고 축하받느라 바쁘며 편한 마음으로 쉬이 잠들어 버렸다. 글을 쓸 땐 언제나 분에 받치고 억울해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채였다. 일기장이 나쁜 감정을 쏟아내는 쓰레기통이 돼 버린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도 내 일부며 병폐를 짚고 가는 작업은 현재와 앞으로의 향방을 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절망으로만 가득 찬 일기장은 삶에 어떤 활력도 주지 못하며,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서 나중에 다시 읽기가 싫다. 그래서 과거로만 쌓아두게 된다.

2년 가까이 신문사 활동을 해오며 느끼는 바도 이와 비슷하다. 신문이란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도 하지만 사회의 하루를 기록하는 일기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의 언론은 구성원의 불행과 절망을 소비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 언론사들은 유명인의 죽음, 개인의 몰락, 비탄에 빠진 유가족의 인터뷰를 경쟁하듯 보도한다. 한때 주요 일간지에서 신입 기자에게 장례식장을 돌아다니며 기삿거리를 찾아오라고 시켰다는 이야기는 이젠 지루한 전설이 됐다.

앞서 말했듯이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고 이를 개선해나가는 과정은 분명 필요하다. 단지, 행복감을 놓치고 불행에만 지나치게 몰입해 언론이 감정의 쓰레기장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일기장은 독자를 피로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 어떤 건설적인 동기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에 짓눌리고 있는 젊은 세대가 내일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은 오히려 행복에 대한 조명과 조그마한 기쁨과 감동에 대한 환기이지 않을까.

관련해 불행한 감정만 가득 쌓여 있는 내 일기에서 드물게 행복감을 기록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고3으로 넘어가던 겨울, 외박 후 기숙사로 복귀하면서 눈 덮인 교정을 바라보며 쓴 글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으며 심장이 짓눌릴 때마다 힘이 돼 주는 순간이다.

‘눈이 쌓인 밤은 밝았다. 도시의 조명에서 쏟아져 내린 빛이 깊이 뭉쳐져 있던 눈에 반사돼 하늘 가득히 구름을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깊이 팬 누군가의 발자국 사이로 무너져 내린 눈을 한 손으로 잡고자 했다. 얼어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것은, 그러나, 내 체온에 금방 그 견고함을 잃고 물가루로 바스라졌다. 나는 내 입김이 부서지는 눈가루처럼 보랏빛 풍경 속에서 희미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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