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패션계의 거장 칼 라거펠트의 패션 미학을 들여다보다

김나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강사

무릇 패션이란, 기본적으로 한 개인이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방식이지만 한편으론 한 시대의 집단적 트렌드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공항패션 이미지 속 어느 셀럽이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 하나도, 어느 SNS 인플루언서의 가방에 장식된 열쇠고리 하나도, 어쩌면 내일부터 최신 유행이 될지도 모르는 시대니 말이다. 지난달 19일, 이 시대의 세계적 트렌드를 이끌어왔던 패션계의 거장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의 부고가 전해졌다. 그보다 한 달여 앞선 1월 22일, 그가 샤넬 오뜨꾸띄르 패션쇼 피날레 무대에 나타나지 않자 패션계는 술렁였다. 그가 샤넬의 수장이 된 지 3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건강 악화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4주 후, 칼 라거펠트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삶은 우리에게 눈을 사로잡는 의상 디자인 그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남겨놨다.

‘럭셔리 민주주의’의 선언

1933년 독일태생 칼 라거펠트는 1955년 국제양모사무국(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에서 주최하는 코트 디자인 경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패션계에 입문했다. 이후 10여 년간 피에르 발망, 장 바투에서 디자이너로 활약했지만 1964년 돌연 미술사 공부를 위해 로마로 떠났다. 항상 과거의 것에서 가장 현대적인 디자인의 영감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던 그였기 때문이다. 1967년 모피 패션 브랜드인 펜디의 디렉터로 다시 패션계에 돌아온 그는 고루한 이미지에 허덕이던 모피에 펠트, 토끼털, 두더지털 등과 같은 다양한 원단을 더해 하이패션의 한계에 도전했다. 그 도전은 결과적으로 펜디를 지극히 현대적이고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칼 라거펠트의 화려한 이력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점은 무엇보다 샤넬 오뜨꾸띄르 컬렉션의 혁신을 이뤘다는 점이다. 마담 가브리엘 샤넬이 세상을 떠나고 10여 년간 내리막길을 걷던 샤넬은 오뜨꾸띄르 수석디자이너로 칼 라거펠트를 발탁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성복 디자이너로서 그의 이력이 다소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1983년 1월 그는 첫 번째 오뜨꾸뛰르 패션쇼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며 모든 논란을 잠식시켰다. 이듬해부턴 기성복 라인까지 총괄하며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이때 그가 샤넬을 부활시킨 전략은 바로 ‘럭셔리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것이었다.

칼 라거펠트는 기존의 샤넬 스타일이 간직한 핵심적인 디자인 요소를 보전하면서도 새롭고 대담한 소재와 재단을 적용했다. 상류층 여성 패션의 대명사였던 샤넬 수트의 트위드 재킷에 데님을 접목한 진(Jean)룩을 선보이며 패션계의 이목을 끈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진은 쉽게 더러워지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영역이 넓을 뿐 아니라 다림질도 필요 없고 세탁도 쉬우며 낡거나 철이 지나도, 혹은 찢어져도 입을 수 있다. 고루한 순응주의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 진은 록뮤직과 캐주얼 의상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를 정숙하고 우아한 여성을 상징하는 샤넬 슈트에 접목한 칼 라거펠트의 시도는 패션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샤넬 수트를 가죽수트로 디자인한 바이커룩을 시도하는가 하면, 남성 속옷이나 반바지와 매치하기도 했으며 급기야 싸구려 비닐 소재의 바지와 가방 등을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즌마다 그는 패션계의 이슈메이커가 됐다.

그가 럭셔리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또 다른 면모는 그가 하이패션계의 대부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브랜드들과의 협업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4년에는 데님 브랜드 디젤과의 협업으로 데님 컬렉션을 선보이는가 하면, 하이패션 디자이너로선 최초로 저가인 SPA브랜드 H&M과의 협업 컬렉션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스와로브스키, 코카콜라, 토즈, 푸마 등 다양한 대중 브랜드들과의 협업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희소성과 고급스러운 이미지, 극진한 서비스 등으로 점철됐던 명품의 핵심 가치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칼 라거펠트에게 있어서 럭셔리란, 더 이상 일부 소수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 가치가 아니라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열린 선택지였던 것이다.

종합예술가, 칼 라거펠트

그의 패션 작업은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았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어떻게 모델에게 입힐지 손수 스타일링하는 것은 물론, 그 스타일링이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무대와 매체도 직접 다뤘다. 그리하여 그가 손수 기획하고 연출하는 패션쇼 무대는 차라리 한편의 퍼포먼스 공연에 가까웠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2007년 패션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 중심에 바로 칼 라거펠트가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인 중국 만리장성을 무대로 유럽 패션 브랜드 펜디의 패션쇼를 펼치는 초특급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밖에도 페미니즘 시위 현장이나 슈퍼마켓, 우주정거장, 인공해변 등 상상을 초월하는 무대 연출 덕분에 그가 진두지휘하는 패션쇼는 언제나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한 전문 사진가로서의 칼 라거펠트의 작업도 놓칠 수 없다. 1987년에는 샤넬 컬렉션의 광고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카메라를 들었다. 패션 사진뿐만 아니라 인물, 정물, 풍경, 건축 등 다양한 피사체를 담는 작업을 시도했고 단편영화까지 직접 촬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2011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칼 라거펠트 사진전을 통해 그의 사진 작업 400여 점이 소개돼 예술계에서 전례 없는 엄청난 관객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노장의 열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작년엔 조각가로서 첫 개인전 ‘Architectures’(2018)을 열어, 인테리어 디자인과 무대 연출로 다져진 그의 감각적 탁월함이 돋보이는 대리석 조각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탁월한 시각적 재능 외에도 그의 유일한 취미는 독서였다고 한다. 벽면 가득 20만 권의 책이 쌓여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그의 스튜디오 사진 한 장이 이를 증명해준다. 일 중독자였던 그에게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다는데, 이쯤 되면 그에게 또 다른 수식어를 제안하고 싶다. 그는 필시 예술중독자였다.

그의 인생 자체가 예술이었고 예술은 그의 인생 전부를 채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저 의상 디자이너로 그를 수식하려 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가 디자인 한 것은 단순한 의상 그 이상의 삶이었다. 소수 계층만이 즐기던 럭셔리 패션을 보다 민주적으로 해방시키는 것, 고고한 자율성의 성벽에 고립돼있던 예술을 패션을 통해 보다 대중화하는 것. 화려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삶의 다른 한편에서 묵묵히 이 두 가지 인생 과제에 충실했던 그의 삶 자체는 럭셔리이자 예술이었다. 그의 방대한 어록 중 한 마디를 되뇌어 본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럭셔리다.”

삽화: 송채은 기자(panma2000@snu.kr)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