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연 기자

학술부

펜을 손에 쥐고, 혹은 키보드를 앞에 두고 선뜻 어떤 단어도 내뱉지 못한 채 나의 감각 속에서 헤매는 일이 잦다. 단순히 내 생각을 잘 정리하지 못하는 것일 때도 많지만, 시간이 흘러 좀 더 많은 경험을 끌어안게 되면서, 지금 내가 쓰는 문장을 통해 내 삶을 일관된 논리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절감한 탓이다. 종종 어떤 문제에 몰입해 새로운 개념들이 내 머릿속에서 형체를 갖춰가는 과정을 문장으로 뱉어내며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 경험이 즐거웠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들뜬 순간이 지나가면 몰입의 경험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왜곡·변형될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머릿속에 남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쓰고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그 어느 것도 문자에 새겨져 그 의미가 고착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자꾸 그것을 거부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몰입 자체를 경계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렇게 되고 있었다.

기계번역 기사를 준비하면서도 사실 얼마간은 그런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기사를 준비하는 게 그렇게 재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뭔가를 열심히 이해하려 하고 있지도 않았고 머릿속에서 개념화하고 있지도 않았다. 내가 품은 이미지들에 경도되지 않으려 그저 아등바등 조심할 뿐이었다.

기사 작성을 위해 취재를 하며 내 태도를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기계번역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지금껏 사람들이 어떤 시도를 해왔는지 조사했다. 그때 나는 어떤 믿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무언가를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비밀스러운 진리를 파헤쳐낼 것이라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토대 위에서 확실한 결과로 도출될 것이라고.

그런데 수많은 실험과 방법론적 혁신을 거쳐 오늘날 고도화된 기계번역 역시도 언어의 원리나 번역의 비밀을 근본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진 못했다. 단지 사람들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이 고안한 개념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비교하고, 결과를 얻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작업이 무언가를 ‘실제로’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단지 끊임없이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이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는 ‘인간만의 무언가’ 곧 더욱더 정확한 기계번역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실제 번역능력, 실제의 세계와 점점 더 닮아가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써 내려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에 집중하는 것일까 봐 나는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실제 모습을, 닮아있는 어떤 이미지로나마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의미있는 나만의 무언가를 만든 것일 테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가 하는 일이 재밌게 느껴졌다. 기계번역 기사를 쓰면서도 점점 더 내용에 몰입하며 내 최선의 끝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것은 분명 행복했다.

삶을 일관된 논리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좌절될 수밖에 없는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대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메타적인 규명을 하는데 목을 매 이미지들에 대한 판단 중지만을 외칠 바에야 나는 다음 기사를 준비하는 데 열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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