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근 교수

국제대학원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국제사회의 질서 구축에 앞장섰다. 국가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많은 분야에서 국제 규범을 수립하고 이를 준수함으로써 공동의 이해를 증진하는 다자체제를 확립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다자체제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허물고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멕시코, 캐나다를 차례로 굴복시켜 무역협정을 개정하고 중국을 위협해 경제관계 전반을 재편하려는 시도는 결국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재구축하는 과정이다.

사실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 시절 비슷한 방식을 시도해 큰 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 인터넷, 반도체 등 혁신적인 정보통신기술 개발에도 불구하고 대일본 무역적자가 급격히 확대되자 지적 재산권 위반을 이유로 일본에 대해 대대적인 무역보복조치를 시행했다. 또한 레이건 행정부는 당시 개념조차 생소하던 서비스무역에 대한 국제통상규범을 도입하고 정보통신산업에 필수적인 지재권 보호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한 세계무역기구를 설립했다. 한편 멕시코,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산업기반을 북미 전체로 재편했다.

최근 실리콘밸리의 토양에서 네트워크, 플랫폼, 인공지능 등 정보통신기술의 성숙으로 출현하는 새로운 산업분야는 기존의 서비스 무역 또는 지재권 보호라는 차원에서 다룰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구글, 페이스북을 금지하는 중국은 5G를 비롯해 각종 부문에 있어 미국의 기술우위를 위협하는 실정이다. 미국이 자유무역협정들뿐만 아니라 세계무역기구를 대폭 개편하려고 나선 이유다. 또한 미국은 디지털무역에 대한 새로운 국제통상규범 도입에 발벗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운 미국 산업계는 데이터의 자유 이동, 서버 지역화 금지, 온라인소비자 보호 등 새로운 국제규범과 원칙을 급속히 확산시키고 있다. 반면 여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검열과 언론통제를 고수하는 중국은 인터넷 주권을 강화하는 법규를 도입하고 미국과는 반대 방향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어 미·중간 대립은 악화일로의 상황이다.

지금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한가운데에 내몰려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 조치는 우리 산업계를 정조준하고 있으며, 중국의 기술굴기는 대부분 우리 기업들을 첫 번째 희생양으로 삼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우린 한반도 비핵화의 운명을 트럼프 대통령에 걸고 있고 우리 경제의 사활은 여전히 중국 시장에 맡겨둔 상황이다. 양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원론적으로는 등거리 외교가 최선처럼 보이나, 현실적으로는 양측 모두로부터 신뢰를 상실해 부수적인 피해만 키울 위험이 크다.

미국과 중국의 현 대치 상황 저변엔 단순히 미국의 대중국 무역수지적자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패권을 두고 벌이는 주도권 대결이 있다. 따라서 지금 전개되는 무역조치를 앞세운 대결국면은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를 넘어 당분간 지속될 공산이 크다. 국제체제의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살 길은 기술력을 향상시켜 글로벌 가치사슬의 핵심으로 위상을 키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 시대적 소명을 다시 한번 우리 사회와 국가가 이뤄내려면 관악에 모인 인재들의 노력과 역량이 더없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산업계와 사회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변하는 경제·사회를 지탱하는 사회규범의 혼란과 부실로 성장통에 시달리고 있다. 변하는 세계 정세와 우리 사회를 직시하고 넓은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인재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곳 관악에서 흘린 땀과 시간으로 단련된 동량이 기로에 선 우리나라를 받치는 재목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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