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연
부편집장

‘야, 니 서울 사람 다 됐네.’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여기서 ‘서울 사람’이란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것이 아닐까. 2호선 지하철에서 당산과 합정,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한강을 건널 때, 내 행동과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 서울이라는 공간이 너무 신기해 목적 없이 서울을 배회하던 나는 이제 서울역으로 가는 501번 버스에서 마주치는 남산타워의 풍경이 전혀 신기하지 않다.

그만큼 시간이 정말 많이, 빠르게도 흘렀다. 새내기로 북적대는 학교를 보며 더욱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그렇다고 졸업을 앞두지도 않은, 학교를 다닐 날들이 학교를 다닌 날보다 많을지도 모르는 내가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조그마한 웃음거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아마도 산전수전 다 겪은 자가 이젠 성공을 쟁취한 위인이 돼, 아래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위인이 말하는 단단함과 내가 지금 말하는 단단함은 차이가 있다. 위인은 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나 결국 정신적으로 성장했다는 의미로 ‘단단함’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을 하지도 못한 내가 그 단단함이라는 단어를 거론했을 때는 다르다.

대학에 입학하고 여러 단체에 몸을 담았다. 하나의 조직에선 으레 그 역할분담이 나뉘기 마련이다. 주어진 역할을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니, 정말 어쩌다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돼버렸다. 개인적인 노력보다 흘러가는 시간에 더욱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시간의 속도를 따라가지도, 모임에 소속감을 느끼기도 어려웠던 나는 결국 자신을 성장시키지도 못한 채 나를 단단히 굳혀버렸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대학신문』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다른 동아리에 또한 처음 발을 디뎠을 때를 생각해본다. 나는 은근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익숙지 못한 곳에선 가만히 있을 뿐이다. 내가 단기간에 이 집단에서 중심이 되지 못할 바엔 같은 학번, 같은 기수와 굳이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히려 이것이 나를 ‘꼰대’로 만들었나보다.

외부 사회와는 달리, 성과급제가 아닌 곳에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그 위치가 높아진다. 실력도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던 나는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맡은 일이 많아지니 그 집단에서 중심이 돼가는 느낌이 좋았다. 애써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그래야 했던 예전과 달리, 진심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다가오는 상황이 좋았다. 그래서 대단한 위인이 된 것처럼 시끄럽게 휘젓고 다녔다.

그런데 요새 이중적인 내 모습에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최근 운 좋게 새로운 동아리에 들어갈 일이 생겼다. 전공도 다르고 개성도 넘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만나서, 두려워졌다. 다시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지만 또 익숙한 곳에선 아래가 아님에도 아래를 내려다보려 한껏 발꿈치를 들고 있다. 낯선 곳에선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며 변화를 말하지만, 비교적 오랜 기간 경험한 곳에선 ‘왜 바뀌어야 하나’며 반문한다.

젊은 꼰대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던데, 아마 그건 내가 아니었던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선 조용히 나를 지워버리려 하지만, 아는 사람들 속에선 바깥 껍질을 단단하게 굳혀버려 세상에 둘도 없는 도피처를 만들었다. 시간에 의해 주어진 역할들은 부끄러운 나를 가리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반성은 끝나야 한다. 시간보다 앞서나가는 내가 되길, 단단해진 바위가 깨지길, 끊어진 맥박이 다시 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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