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형법안에 대한 심의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전시국회는 1948년 헌법전에 이어 제정되는 형법전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일제의 식민지 압제를 상징하는 일문(日文) 형사법령을 극복하는 중대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약 400개 조문의 형법안 본칙에 대한 심의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부칙에 대한 심의가 시작됐다. 부칙에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법령의 하나로 명시되어 있었다. 심의에 이르자 자유당 의원 한 사람이 발언을 청했다.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국민들에게 국가안보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후 국회표결에서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여론을 의식해서였는지 기권해 버렸다. 기권 때문에 국보법 폐지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신형법이 국보법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법전편찬위원장과 국회법제사법위원장의 설명은 법률전문가의 비현실적인 이론구성으로 치부됐다.

 

요즘 국가보안법 존폐를 둘러싸고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하다. 정치권에서는 적전의 무장해제니 보안법폐지를 주장하는 자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숨어있다느니 하는 말이 나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곧 국가안보의 폐지라는 50년 전 자유당 의원의 발언이 글자 그대로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 일전에 서울대 박물관에서는 일제시대의 사진원판을 주제로 전시회가 열렸다. 푸르스름한 빛바랜 사진 속에는 1920∼30년대의 사람들 모습이 정지된 채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존폐를 둘러싼 작금의 논의는 그러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법리적으로 형법은 국가보안법을 흡수ㆍ폐지하기 위해 제정됐다. 사상의 자유를 지적한 형사법 3개 학회의 성명은 이를 학리적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 폐지는 국가안보의 포기라고 주장한다. 표를 의식하는 국회의원들은 여론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논의에서 발을 뺀다. 50년 전 국회의원들처럼 기권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앞으로의 또 다른 50년 동안 빛바랜 스틸사진에 갇혀 살게 되지 않을까? 정치권의 냉정한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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