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에겐 소장 도서가 거의 없었다. 친구들 집에 가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명작 동화전집이나 위인전 같은 책은 물론 흔한 그림책들도 우리 부모님은 어쩐 일인지 사줄 생각을 안 하셨다. 더군다나 나는 외동아들이었는데. 더군다나 나의 아버지는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분이셨는데.

당신들은 아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제공하는 일에 왜 그렇게 무심하셨을까? 초등학생 시절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책 선물이라고는 『만화왕국』이라는 어린이 잡지의 창간호가 유일했다(그것도 내가 무슨 일인가 말썽을 부린 탓에 흠씬 매를 맞고 무마용으로 받은 것이었다). 당시 우리집 살림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듯한 핑계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는 당신을 위해 비싼 외국 책을 사는 데는 상당한 열의를 보이셨으니까. 어쨌건 다른 친구들 집에 있는 어린이용 책들이 우리 집에는 없다는 것이 조금 섭섭했다. 한창 자라날 나이에 방구석에 처박혀 책을 읽는 것보다는 밖에서 왕성하게 뛰노는 것이 좋다는 깊은 배려였을까? 덕분에 그 시절의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놀이터와 골목을 누비며 어린이의 본분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여덟 살 때 수두에 걸렸다. 얼굴에 온통 물집이 생기고 열이 삼십팔도 삼십구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꽤 호되게 병치레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한 이틀 고열로 정신을 못 차리다가 웬만큼 고비를 넘겼을 무렵, 아버지가 이삼십 권 정도 되는 책을 들고 오시더니 내 이부자리 옆에다가 쌓아 놓으시는 것이었다. 어린이용 『아라비안 나이트』,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 동화집』, 『로서아 민담집』 등등 온갖 동화책들이었다. 일주일쯤 학교를 빼먹으며 이불 속에서 빈둥거리는 동안 그 책들을 모조리 읽어버렸다. 알리바바가 벌이는 신기한 모험들, 요술 램프의 지니, 이국의 화려한 궁전들, 엄지공주, 백설공주, 신데렐라, 바보 이반… 동네 놀이터와 골목에서 야만의 삶을 영위하며 자족하던 나에게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병 때문에 열에 들떠 있던 터라 이 세계의 환상은 한층 증폭되어 내 머릿속에 완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날들 이후로 나는 ‘꿈꾸는 아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낮에는 정체를 숨기고 보통 어린이의 본분을 다했지만, 밤에 잠자리에 들면 알리바바로, 페르시아 왕자로, 바보 이반으로 변신해 세상을 편력하는 모험가의 삶을 즐기다 잠이 들곤 했다.

내가 수두를 다 앓고 난 뒤 아버지는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책들을 거두어가셨다. 수두도 물러가고 책도 없어졌지만 양미간에는 작은 곰보자국이 하나 남았고 마음속에는 화려한 모험의 세계가 남았다.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중생활이 언제쯤 청산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해 나의 독서가로서의 경력도 시작되었던 것 같다. 물론 부모님은 여전히 책을 사주지 않았으므로 친구 집 서가와 학교 도서실이 나의 공략대상이었다.

어른이 되어 마음껏 내 책을 살 수 있게 되면서, 어릴 때 못 먹고 자란 자가 나중에 벼락부자가 되어 식탐에 빠져들듯이, 닥치는 대로 책을 사 모았다. 덕분에 연구실에도 집에도 책이 넘쳐난다. 잡독에다가 난독(亂讀)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나는 온갖 종류의 책을 집안 여기저기에 늘어놓고 자리를 옮길 때마다 번갈아 읽는 것을 즐긴다. 항상 이삼십 권의 책이 여기저기서 나를 읽어달라고 기다리고 있으니 하나를 온전히 보살펴 주기가 힘들다. 수두 시절의 그 열정이 되살아난다면 일주일만에 모조리 처치해버릴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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