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판소리의 고전 『조선 창극사』

10년 전에 개봉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흥행기록 못지 않게 판소리를 우리 곁에 다가서게 한 영향이 컸다. 지난 7월 소리무대를 저승으로 옮긴 박동진 명창은 CF 광고에 출연하여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판소리의 대중화에 한 몫 했다.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멋과 풍류가 어우러진 민중음악이지만, 일반인들에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격이었다. 서양음악이론만 배워 온 젊은이들은 클래식이나 팝송ㆍ대중가요에 더 심취해, 판소리는 고리타분한 옛 소리로 관심 밖이었다.


민족문화의 주체성 회복을 위해 정부는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다채롭게 펼쳤다. 당시 필자는 국악의 해 연중시리즈로 ‘소리의 맥(脈)’을 기획하고, 취재자료를 챙겼다. 그러나 판소리에 관련된 책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판소리 관련서적 중 가장 오래된 책은 1940년에 발간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조선일보출판부)다.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인 정노식은 전도성 명창의 구술을 바탕으로 이 책을 기술했다. 설화전승의 판소리 유래와 역대 명창들의 약력과 더늠(명창의 특징적인 판소리 대목)을 수록해 놓았지만, 대부분 ‘어느 명창은 언제 어디서 태어나 판소리 어떤 대목을 특히 잘 불렀다’는 식의 기록에 불과하다.


판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구두전승예술로 제대로 정립된 이론이나 기록이 없는 황무지이기에 그 정도 기록일지라도 값지고 소중한 자료다. 그나마 구하기가 어려워 국회도서관에서 복사를 해서 참고자료로 삼았다. 다행히 국악의 해에 맞춰 『조선창극사』 복각판(동문선)이 나왔다. 30년을 건너뛰어 1974년에 박황이 쓴 『판소리 小史』(신구문화사)가 출간됐지만 이 책 역시 절판되어 구하지 못했다. 3년 뒤 『판소리 소사』를 보완하여 출간된 책이 『판소리 二百年史』(도서출판 사사연)다. 판소리를 시대별로 정리하고 시대별 명창들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 또한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역사적 고증에 유의하였으나 기록에 의한 것이 아니고 구전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역사로 치면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에 가깝다’고 했다.

『조선 창극사』나 『판소리 이백년사』는 구술이나 구전을 중심으로 엮어 오류나 왜곡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간략히 사례를 들면 『조선창극사』(복각본) 206쪽 명창 유성준 편엔 ‘유성준은 전라북도 남원 출생이다. (중략) 토별가에 장하다’라고 한 뒤 ‘토별가’ 가사를 적어 놓은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현장 취재결과 유성준 명창의 고향은 남원이 아닌 구례로 밝혀졌다. 당시 행정구역 경계가 불분명한 것이 원인이다.


또 『판소리 二百年史』(1994년 중판본) 245쪽 ‘김연수 명창’편엔 ‘김연수는 1907년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 적대봉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14세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고, 고흥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 중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니 창악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지성인이라고 하겠다’고 기록해놓았다. 이 또한 현장 확인 결과 김연수 명창은 무계(巫系) 집안 출신이었고, 학력 조회를 해보니 중동고보 졸업자 명단에 없었다. 하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두뇌가 명석했다는 증언은 많이 들었다.


국악의 해를 계기로 판소리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우리문화의 정체성을 찾자는 소기의 성과는 거둔 셈이다. 필자 또한 신문에 연재했던 기획시리즈를 묶어 『판소리 답사기행』(민예원)을 펴냈고 판소리와 더욱 친숙해진 계기가 됐다. 애원성 짙은 임방울 명창의 ‘쑥대머리’ 절창을 들으면 콧등이 시큰해지고,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을 들으면 어깨가 절로 들먹거려진다. 그래서 판소리는 우리의 정서와 궁합이 맞다.

이규섭
시인ㆍ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