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민중의 혼이 담긴 '마슬레니차'에 가다.
러시아 민중의 혼이 담긴 '마슬레니차'에 가다.
  • 서은혜
  • 승인 2019.03.1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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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 마슬레니차 축제의 어제와 오늘

춥고 길었던 러시아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6개월이 넘는 겨울을 보내야 하는 러시아인들은 봄의 기운이 고개를 내밀자마자 다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마슬레니차’(maslenitsa) 축제를 연다. 고대 슬라브 때부터 내려온 마슬레니차는 여러 역사적 변화를 거쳐 많은 러시아인이 즐기는 민중 축제로 자리 잡았다. 『대학신문』에선 지난 4일(월)부터 10일까지 진행된 마슬레니차 축제 현장을 방문해 고대 세시 풍속인 마슬레니차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계승됐는지 살펴봤다.

 

 

 

태양을 동경한 민족의 전통

러시아의 종교를 물으면 러시아 정교가 쉽게 떠오르지만, 원래 러시아엔 자연 숭배 성격을 띤 토속 신앙이 존재했다. 농사를 지었던 고대 슬라브인들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농사력(農事歷)에 따라 다양한 축제를 열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다. 특히 러시아의 지리적 특성상 겨울이 한 해의 절반 이상 동안 계속됐기에 슬라브인들은 봄을 맞이하는 축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 축제가 바로 마슬레니차의 기원이다. 

봄맞이 축제가 열리면 슬라브인들은 ‘벨레스’(veles) 신을 기렸다. 벨레스는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농경과 목축의 신으로, 사람들은 벨레스에게 한 해의 풍요를 기원했다. 슬라브인들은 곰이 신성한 치유력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해 벨레스 신과 곰을 동일시했다. 따라서 슬라브인들은 곰처럼 춤을 추며 집 주위를 돌면서 집 안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자 했다. 

슬라브인들이 항상 동경했던 태양을 상징하는 물건도 봄맞이 축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축제가 열리면 사람들은 태양을 형상화한 수레바퀴를 매단 썰매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녔으며, 태양처럼 둥글게 생긴 러시아 전통 팬케이크 ‘블린’(blin)을 만들어 먹었다. “사랑스러운 마슬레니차야, 무엇을 가지고 왔니? 그래, 맛있는 블린과 밝은 태양을 갖고 왔지”라는 표현은 블린과 태양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황영삼 교수(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는 “슬라브인들이 비잔티움으로부터 정교 신앙을 수용하기 이전 춘분 무렵에 행하던 마슬레니차는 따뜻한 계절의 시작을 축하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잔치였다”고 설명했다.

마슬레니차는 드넓은 땅에 흩어져 살던 슬라브인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는 행사기도 했다. 그들은 봄이 온다는 사실에 들떠 새 옷을 입고 함께 전통 놀이를 즐겼다. 대표적인 전통 놀이는 ‘호로보드’(khorovod)로 우리네 강강술래처럼 대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손을 잡고 둥글게 도는 춤이다. 황영삼 교수는 “많은 사람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율동이 슬라브인에게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행동이 집단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굴랴니예’(gulyaniye)나 남자들이 편을 나눠 대결하는 ‘얼음 성벽 공방전’과 ‘주먹 싸움’도 있었다. 황영삼 교수는 “주먹 싸움의 경우도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1998)의 한 장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집단 간에 행해지던 선의의 격투였다”며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우리의 ‘기마전’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들 모두 공동체 정신과 관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정교의 옷을 입다

토속 신앙에 기반을 둔 마슬레니차는 러시아가 기독교화된 이후에도 강한 생명력을 유지했다.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리스에서 정교 신앙을 수용한 이후 러시아의 공식 종교는 러시아 정교가 됐다. 러시아 정교회는 미신적이고 향락적인 마슬레니차 문화를 없애려 했지만, 이미 민중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전통을 없애긴 힘들었다. 대신 교회는 마슬레니차를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종교적 행사로 전환시켰다. 황영삼 교수는 “춘분 시기에 즐기던 마슬레니차는 러시아정교회의 지시로 부활절 이전의 경건한 시기인 사순절과 겹치지 않도록 겨울 쪽으로 앞당겨졌다”고 말했다.

마슬레니차의 끝과 동시에 시작돼 부활절까지 이어지는 사순절 기간은 고기와 유제품을 먹을 수 없는 금육기였다. 따라서 마슬레니차는 사람들이 금육기 전에 마지막으로 버터, 우유 등의 유제품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마슬레니차를 즐기며 러시아 전통 팬케이크 블린에 버터를 듬뿍 발라 가족 및 손님들과 나눠먹었다. 마슬레니차의 어원이 버터를 의미하는 ‘마슬로’(maslo)일 정도다. 김상현 교수(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는 “마슬레니차는 엄숙한 종교 축일 전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허락된 ‘민중 축일’이었다”고 설명했다. 

기독교 도입 이후 마슬레니차는 러시아 정교의 행사가 됐지만 그 토속 신앙적 성격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고대 슬라브인들이 농경과 목축의 신인 벨레스에게 한 해의 풍요를 기원했다면, 러시아 정교가 도입된 이후 사람들은 동물을 수호하는 기독교의 성인 블라시우스에게 블린을 바치며 가축들의 건강과 풍작을 기원했다. 김상현 교수는 “고대 슬라브인의 다신교적 신념 체계가 기독교의 신학과 습합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천둥신, 바람신, 곡물신 등 이교 신들이 기독교 성인으로 둔갑됐다”며 “이렇듯 기독교 도입 이후에도 토속 종교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현상을 이중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덧붙였다. 

마슬레니차 기간 중 토요일은 ‘조상의 날’로 기념됐는데 이는 슬라브 고유 전통에 기원한 행사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민속학부 엘레나 미뇨녹 선임연구원은 “마슬레니차 때 조상을 기리는 것은 러시아 정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행사”라며 “슬라브인들은 조상들이 새해의 농사를 지켜준다고 생각했기에 봄맞이 축제 때 모든 조상들을 기렸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교가 도입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조상들을 기리는 예배를 드렸고 부모의 묘지에찾아가 읍소하며 부모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민중 종교에 기반을 둔 ‘마슬레니차 인형 태우기’ 행사는 러시아 정교에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됐다. 사람들은 마슬레니차 축제 첫날 겨울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마슬레니차 인형을 만들었고 축제 마지막 날 마슬레니차 인형을 태웠다. 엘레나 미뇨녹 선임연구원은 “사람들은 겨우내 사용했던 낡은 짚으로 얼굴이 없는 마슬레니차 인형을 만들었다”며 “낡은 짚으로 만들어진 인형을 태우는 행사는 새로운 경작의 시작을 의미했다”고 밝혔다. 마슬레니차 인형을 불태우는 행사엔 불로써 땅의 생명력을 소생시킨다는 의미도 있었으며 사람들은 인형을 태운 재를 밭에 뿌려 한 해의 풍작을 기원하기도 했다. 김상현 교수는 “불의 정화 작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토속 신앙이 기독교 도입 이후에도 생존해 인형을 태우는 행사가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마슬레니차 마지막 날, 사람들이 얼굴 없는 마슬레니차 인형을 태우며 ‘마슬레니차 장례 치루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마슬레니차 마지막 날, 사람들이 얼굴 없는 마슬레니차 인형을 태우며 ‘마슬레니차 장례 치루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마슬레니차를 맞아 전통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블린을 나누고 있다.
사람들이 마슬레니차를 맞아 전통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블린을 나누고 있다.

 

민중의 마음에 새겨지다

러시아에 기독교가 도입된 이후 교회력에 따라 진행되던 마슬레니차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맞는다.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 정권은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소련 정부는 종교 탄압 정책을 펴며 모든 종교적 명절과 민족적 축제를 부정했고 마슬레니차 역시 중단됐다. 그러나 종교 탄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블린을 나눠 먹는 등 마슬레니차를 이어왔고, 소련 정부도 권력의 안정을 위해 마슬레니차와 유사한 축제인 ‘러시아 겨울의 날’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황영삼 교수는 “러시아 겨울의 날 행사는 ‘위로부터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으며 진정한 마슬레니차 전통은 국가 지도부의 간섭이 사라진 소련 해체 이후 지역에 따라 자발적으로 재생됐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에선 사순절이 시작하기 전 일주일 동안 흥겨운 마슬레니차 축제가 열린다.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전통 옷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축제 마지막 날인 일요일엔 곳곳에서 마슬레니차 인형 태우기 행사가 개최된다. 김상현 교수는 “고대 세시 풍속인 마슬레니차가 오늘날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의 모임을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놀이 문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쥐불놀이를 하듯이 러시아인들은 호로보드, 굴랴니예, 주먹 싸움 등의 놀이를 여럿이 모여 즐긴다”고 언급했다. 

마슬레니차 축제가 여러 변화를 거친 만큼 사람마다 축제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다르다. 일간지 「러시아 정교와 평화」는 매년 러시아 정교 신자로서 마슬레니차를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기사를 싣는다. 그들은 마슬레니차의 용서와 화해의 특성을 강조하고 인형 태우기 풍습을 거부하며, 마슬레니차는 사순절을 준비하는 기간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 민중들은 마슬레니차를 종교적 명절로 여기기보다는 슬라브 민족의 전통이나 유흥을 즐기는 축제로써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 니나 포랴코바 씨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 마슬레니차가 슬라브 민족의 전통이라고 배웠다”며 “마슬레니차 기간에는 가족들과 블린을 구워 먹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어떤 이들은 슬라브 전통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이들은 블린을 먹으며 즐기기 위해 마슬레니차에 참여한다”며 “마슬레니차가 러시아 정교회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엔 사람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축제로 여겨지는 것 같다”고 생각을 전했다.

기자가 마슬레니차 현장 취재를 위해 방문한 상트페테부르크 엘라긴 섬에는 봄맞이 축제가 열리고 있음에도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오늘날 마슬레니차는 러시아정교회나 소련 정부 등 위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중들의 자발적인 축제로 자리 잡았다. 도시의 길거리에서도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러시아인들의 모습은 마슬레니차가 러시아 민중이 지켜낸 축제임을 알게 해준다. 마슬레니차는 봄을 동경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러시아 민중들이 사랑하는 축제로 계속될 것이다.

마슬레니차 축제가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 엘라긴 섬에서 아이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마슬레니차 축제가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 엘라긴 섬에서 아이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0@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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