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선 임현 소설가의 신작 소설을 5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다음 내용은 1983호(4월 1일 자)에서 이어집니다.

1. 수경은 올해 초에 전주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에 특별히 연고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으므로 나는 그간 수경이 겪은 불행한 일들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다. 유희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았다. 얼마 전엔가는 유희에게 무언가를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낮에 전화한 일이 있었는데 대단할 건 아니고, 급한 일도 아니었으나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아서 기다리는 동안 조금 화가 나버렸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누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를 한 거냐, 몇 번을 걸었는지 아느냐, 내가 막 따지기도 전에 유희는 전주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먼저 말했다. 그러고는 족히 한 시간이 넘도록 근래 수경이 키우기 시작했다는 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 유희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니가 거기서 혼자 좀 외로운가 보더라.”

그걸 듣고 있자니 먼저 화를 내지 않은 게 내 입장에서 몹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유희는 수경이 일주일 정도 일본 동남부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올 거라는 소식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것을 부추긴 것은 유희였다. 몇 해 전, 우리가 다녀온 온천 여행을 추천해 준 것이었는데 다만, 인천공항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항공편 때문에 일정이 조금 애매해졌다는 말도 꺼냈다. 그런 이유로 출국 전날, 수경을 우리의 일산 신혼집에서 재우는 게 어떻겠냐고 유희는 제안했다. 이미 가까운 정류장의 공항버스 배차 시간까지 알아본 뒤였고, 딱히 내 허락을 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느끼기에 유희는 그 여행에 자신이 동행하지 못하는 것에 어딘가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같았다.

 

재작년 가을, 수경은 딸아이를 위해 구청에서 운영 하는 유아용 축구교실을 등록했다.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은 아이가 혹시나 다치지 않을까, 수경의 남편은 걱정이 많았으나 아이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한번은 유희와 나도 아이의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규모가 매우 작은 잔디 구장에서 각각 일곱 명씩 팀을 이룬 경기였다. 전체적으로 느리고 지루했으나 응원석의 부모들만큼은 열정적이었다. 몸 어딘가에 공이 스치기라도 하면, 골이라도 넣은 것처럼 환호했다. 수경의 아이는 두 발 모두 목발을 짚은 것처럼 줄곧 허우적대고 있었다. 공이 아니라, 자기 발을 걷어찰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 봐.”

어린 선수 중 누군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소리친 곳으로 모든 선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이름도 모를 들꽃이 있었고, 이후의 경기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시합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날 수경과 우리 내외는 그곳의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당장 경기장 안으로 뛰쳐 들어가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없었던 수경의 남편만은 아이에게 있을지도 모를 사고에 대해 걱정했다. 고작 공을 차는 것이 다섯 살 여자아이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수경을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수경은 남편에게 반론할 만한 결정적인 사례를 갖게 된 것이다. 나와 유희 역시 우리가 목격한 장면을 증언하며 수경을 거들었다. 위험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사고는 전혀 의외의 곳에서 일어났다. 우리 중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라면 아무 염려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 불과했다. 축구교실 통학버스에 아이를 태웠다가 시간이 되면 마중을 나가는 일, 그러니까 그런 반복적인 날들 중 아주 예외적으로 아이를 태운 버스가 전복되었다.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돌아오는 연휴나 휴가철에 대한 계획을 함께 의논했을 것이다. 불과 서너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것들을 계획하고 조정하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제는 몹시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때의 수경과 지금의 수경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 모두에게 중요했던 문제는 여전히 우리 내외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나 수경에게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랬으므로 유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좋은 여행지를 추천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일이 수경에게 어떤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2. 그날 늦은 저녁 즈음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을 열어준 것은 수경이었다. 유희는 식탁 위에 몸을 기울인 상태로 나를 맞이했는데 이미 상당히 취한 모습이었다. 그들 둘이 먹고 남긴 음식이 주변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구겨진 맥주 캔이 여럿 있었고, 반쯤 비운 와인병도 보였다. 두 사람이 먹기에 많은 양이었고 세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식욕들이 대단해.”

비아냥거릴 의도라고는 전혀 없이 오랜만에 보는 수경을 향해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둘이서 아주 신나 보이는데?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미리 전화라도 좀 줬다면 더 늦게 들어왔을 텐데.”

유희는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바로 세우더니, 평소와 다르게 과격한 몸짓으로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그게 꼭 버둥거리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유희의 표정도 유난스럽게 장난스러워 보이는 것이 몹시 낯설었다.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처럼 어색했는데, 나는 접시에 남아있는 음식을 집어 먹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자리에 끼어들었다. 수경을 바라보며 유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유희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혹시 울었어?”

묻는 말에 뭐라 대답하지 않고 대신 유희는 전보다 더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는데, 그런 탓에 내가 없는 동안 도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건지 나는 조금 신경 쓰였다. 수경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출국 전날에 이래도 괜찮아?”

“괜찮지 않지, 당연히. 괜찮을 리가 있겠어? 처음부터 괜찮지 않으려고 마시는 거야. 안 괜찮으려고.”

그러고는 내 몫의 잔을 가져와 술을 채워주었다. 남의 집 찬장을 열어 필요한 물건을 단번에 꺼내는 수경의 모습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런 어색함 없는 행동들이 나는 조금 다행스러웠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아주 나빠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쁜 것은 오히려 유희였고 얼마 있지 않아 식탁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버렸다.

“이사한 곳은 좀 어때?”

“그냥, 뭐. 다 낯설지. 아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개라도 키우니까 덜 심심하더라.”

그렇게 말하면서 수경은 엎드린 유희의 뒷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는 본래 어떤 형태였는지 짐작도 되지 않은 튀김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서 지금이라도 다시 올라와 사는 게 어떻겠냐고 수경에게 권했는데 별다른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수경이 걱정이 되었고, 가까운 곳에서 있다면 더러 왕래하며 우리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한번은 마트에서 누가 나를 보고 웃는 거야.”

“누가?”

“몰라, 모르는 사람. 그런데도 웃으니까 나도 따라 웃었거든. 그게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나를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그냥 웃었지.”

그날의 수경은 마트에서 우유를 고르는 중이었고, 습관대로 유통기한을 살피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쪽을 비교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도 그게 자꾸 생각나는 거야. 누구였을까. 누구길래, 나를 보면서 웃는 걸까.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거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나를 보고 웃는 걸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실은 그 사람이 날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을 하고 보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웃을 만한 거야. 고작 더 신선한 우유를 고르려고 내가 이것저것 집어 들고 있으니까, 얼마나 웃겼겠어. 그게 자꾸 생각나. 그 사람은 내가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면 어떡할까.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웃으면 웃어주는 사람이 이제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거면 어떡해. 그런데 아니거든. 아직도 자꾸 생각나거든…. 그래서 내려갔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대로 우유도 고르고 내키는 대로 웃고 싶어서.”

그러고는 수경은 마치 그날의 수경처럼 쓸쓸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에도 수경은 유희의 머리를 쓰다듬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 장면 이 내게는 몹시 슬퍼 보였다. ■ 

 

임현 소설가 

»2014년 「현대문학」 등단 

»단편집 『그 개와 같은 말』 

»제8회 젊은작가상 대상(2017) 수상 

»제9회 젊은작가상 본상(2018)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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