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snu.ac.kr
삽화: 송채은 기자 panma200@snu.ac.kr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봤다. “지금까지 썼던 모든 소논문과 보고서는 항상 이런 식이었음. 서론: 나는 인류를 구할 난제를 해결할 것이다 / 본론: 졌지만 잘 싸웠다 / 결론: 인류는 다음에 구할 것이다”(트위터: 휘밧 @xywaz). 학부생 시절에 제출했던 과제물들을 떠올리며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생각해보니 웃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읽고 쓰는 글들은 ‘졌지만 잘 싸웠다’와 얼마나 같고 다를까.

얼마 전 학위논문 제출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관심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많이 읽고 정리해야 했다. 많은 사회과학 분야가 그렇듯, 내가 공부하고 있는 교육학 분야의 논문 형식은 미국심리학회(APA)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APA 논문작성법』은 1929년 짤막한 논문을 통해 소개된 이래로 개정·보완을 거듭해 지금(6판, 2010년 출간)은 논문의 구성요소 및 구조부터 표기법과 같은 기술적 양식까지, 논문 작성에 관한 전반적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학술논문은 보통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서론에선 연구자의 문제의식을 밝히고, 관련된 선행연구나 이론적 배경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선행연구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연구가 어떤 기반 위에 있는지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기존 연구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자신은 기존 연구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내보인다. 본론에서는 그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연구자의 고군분투의 과정이 담긴다.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할 만한 것은 남들이 다 해놓았으며,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나마 새로운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밝혀낸 연구라고 해도 역시 나름의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성실한 연구자는 논문의 결론부에 해당 연구의 성취를 밝히면서도 한계 역시 겸허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후속 연구자에게 남겨둔다. 

다른 대안적 작성양식에 대한 논의도 꾸준히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이 전통적인 양식이 무척 그럴싸하다고 생각한다. 이 전통은 일차적으로는 학문공동체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합의이기도 했지만, 학술연구가 따라야 할 논리적 과정을 충실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양식 그 자체에서 좋은 학술적 태도가 무엇인지도 엿볼 수 있다. 그 태도 중 하나는 어쩌면 겸허함과 존중이 아닐까. 타인의 연구를 뒷짐 지고 비평하기는 쉽다. 그 한계를 넘어섰다고 해서 내 연구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료의 한계도 있고 역량의 한계도 있다. 우리는 모두 한계 안에서 연구한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타인의 연구에 대한 존중이 가능해진다. 모두가 한계가 있으니 질적 수준에 대한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존중이 있어야 오히려 더 정확하고 풍부한 평가가 가능하다. 연구가 놓인 조건과 가능성, 결과를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겸허함과 존중의 가치는 꼭 연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 오만하고 옹졸한 사람이라 자주 누군가를 미워한다. 그럴 때마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나는 뭐 잘났나’ 하고 되뇌다 보면 가끔은 ‘저 사람도 훌륭한 동료 시민이 되려고 시도는 했지만 실패한 거겠지, 그래, 당신도 졌지만 잘 싸웠다’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말이다. 동료 시민의 행동을 선의로 해석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없다면 어쨌거나 나도 그리 좋은 동료 시민은 아닐 것이다. 연구도 사는 일도, 지더라도 잘 싸워야 할 텐데, 갈 길이 멀다.

신중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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