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우 기자학술부

박재우 기자

학술부

우연한 기회로 한중 국제정치학자들이 참여한 학술대회를 갔던 적이 있다. 나야 학부생에 불과하니 중국 학자가 뭐라 하면 ‘그렇구나’ 듣고, 한국 학자가 뭐라 하면 ‘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열한 논리 싸움을 하면서도 서로 웃고 악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학계는 참 따뜻한 곳이구나’(?)란 생각도 해봤다. 이런 착각은 초대해주신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산산조각 났다. “웃고 떠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가 일종의 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란다.” 그렇다. 내가 못 보고 있는 사이에 학자들은 학술 교류란 멋있는 이름의 전선 하에서 국익을 위한 논리 개발에 힘쓰고 있었다.

일대일로를 취재하면서 한국이란 국가가 처해있는 환경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동북아 바깥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북한과의 문제로 한반도 및 동북아에 ‘강제로’ 시선이 묶여있을 때, 일본은 나름의 외교술로 동남아와 아프리카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인도는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척하면서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러시아나 유럽연합은 중국이 일대일로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못내 불쾌한 눈치였다. 동남아시아 국가와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나름의 손익계산서를 두드리며 인도-중국-미국 또는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자기 살 길을 찾고 있었다. 잠시나마 마치 전지적 작가가 된 듯 돌아가는 꼴을 보니, ‘외교관들이 참 고생 많구나’ 싶었다. 개인도 아니고 국가의 생존이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다니. 

국가란 주권자가 없는 국제정치는 이렇게 무서운 ‘현실’이 지배한다. 그리고 우린 그 무서운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국익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예컨대 일대일로에서 중국이 개도국에 자본을 빌려주고 인프라를 지어주면, 현지의 산업 기반과 일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국가 차원에서 얻을 이익은 모르겠으나, 현지인이 받을 피해는 어마어마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우리 기업이나 정부가 국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대일로에 참여한다면, 현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한반도신경제지도’나 ‘인도-동남아와의 협력’을 말할 때, 정작 그곳에서 피해를 받는 사람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투자로 서로 ‘윈-윈’이라는 ‘이상’을 이루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대일로에 반감을 갖고 시위를 벌이는 군중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저 숫자상 수치나 글자가 아니라 좀 더 실체로 와닿았다. 

여기서 『대학신문』 TMI(Too much information) 하나. 매 학기 초 기자들은 자기가 쓰고 싶은 표어 하나를 선택한다. 일종의 ‘기자 좌우명’인 셈인데, 딱히 선택할 문구가 생각 안 나서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한 마디가 ‘현실과 이상 사이’였다. 나는 ‘서생적 문제의식, 상인적 현실 감각’이란 말을 좋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인 시절부터 쓰던 용어라고 한다. 그 말인즉슨 정치인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때 현실을 생각해야 하고, 현실에 부딪힐 때 옳음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가 말했던 일종의 ‘책임 윤리’인 셈이다. 현실과 이상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국익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답이 있냐고? 물론 나도 모르니까 던져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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