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신동현 <br></p><p>학술부장<br></p>
신동현
학술부장

나는 (국제)정치학도다. 사람들이 정치학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권력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라 답한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의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정의를 내렸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권력 붕괴의 가장 큰 특성이 ‘느닷없음’이란 것만은 피부로 기억하고 있다. 

정치학도가 되기 12년 전 즈음 나는 미국 중서부의 시골 도시 블루밍턴에서 보잘것없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옥수수밭밖에 보이지 않는 벽촌이었지만 블루밍턴은 ‘인종의 용광로’로 불리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주축을 이루던 동네였고, 그 아이들도 자연히 다른 나라 아이들과 부대끼며 자라났다. 

8살의 나는 그 동네 ‘국제 어린이계’를 주도하던 자칭 ‘FBI’의 일원이었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9살 안톤, 8살 나, 그리고 나와 동갑이던 한국인 우진으로 구성된 자칭 FBI는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한 권력 집단이었다.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FBI 단원들은 어머니를 졸라 장난감 선글라스를 얻고, 아버지의 넥타이를 슬쩍해 드레스코드를 맞춰 조직 기강을 확립했다. 우린 맞지도 않고 멜 줄도 모르는 넥타이를 휘날리며 자전거 위에서 동네를 호령했다. 

그 권력 집단의 핵심엔 권력에 일찍 눈을 뜬 ‘보스’ 안톤이 있었다. 안톤은 시대에 뒤처졌지만, 나이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간 제국주의자였다. 안톤은 제국주의의 금과옥조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통해 조직을 휘어잡았다. 하루는 안톤이 갑자기 내게 “너는 FBI 나이로 7살이고 우진은 8살, 나는 9살이야”라고 선언했다. 느닷없이 조직의 3인자로 밀려난 나는 안톤도 미웠지만, 그 옆에서 가만히 있는 우진이 더 얄미웠다. 

그러다가 안톤이 자신의 정책을 급선회해 나를 2인자로 우대하고 우진을 3인자로 강등하는 인사교체를 단행했다. 썩 달갑지 않은 반전이었지만 나 역시 이전의 우진과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안톤은 수시로 자신의 2인자를 변경하면서 나와 우진을 분열(divide)시키고, 여기서 충성 경쟁을 이끌어내 우리 머리 위에 군림(rule)했다. 

안톤의 권력은 무소불위로 보였지만, 정말 느닷없이 무너졌다. 안톤이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났던 겨울, 나는 우연히 길에서 우진을 마주쳤다. 우리 둘은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안톤의 전횡이 도를 넘었다는 것이었다. 마법같이 ‘공기’가 바뀌었다. 우리가 눈을 마주친 그 순간 안톤의 권력은 무너졌다. 

겨울이 끝나갈 때가 되자 안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돌아온 안톤은 나와 우진의 갑작스러운 냉대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사색이 돼 갑자기 자신한테 왜 그러냐며, 자신은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라며 항변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 셋 모두 안톤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톤을 공식적으로 축출하는 과정은 없었어도, ‘공기’가 바뀐 것이었다. 

권력의 붕괴는 8살짜리 꼬마들 사이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흔한 일임과 동시에, 단순한 사실과 거친 인과로 파악하기엔 너무 심오한 일이기도 하다. 부당한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사건들과 인과관계가 켜켜이 쌓인 끝에 무너진다. 우리는 이 작은 성과들이 쌓이는 것을 보지 못해 좌절한다. 그러다가 막상 권력이 무너지면, 우리는 ‘느닷없이 공기가 바뀌었다’며 당혹스러운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누군가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성과를 쌓아올리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음에 좌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용기를 잃지 않으면, 그의 공기도 느닷없이 바뀌고 부당한 권력이 무너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