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연기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목소리의 힘
보이지 않는 연기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목소리의 힘
  • 이승연 기자
  • 승인 2019.03.24 0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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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만나드립니다 | 정재헌 성우를 만나다

만나고 싶어도 개인적으론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대 학생들이 만나고 싶었던 인물을 대신 만나보기 위해 『대학신문』이 나섰다. 지난 한 달간 『대학신문』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진행한 설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선 ‘대신 만나드립니다’를 운영한다. 이번 코너에선 인터뷰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지면 기사와 영상 콘텐츠를 함께 준비했다.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 혹은 일반적으로 생명체라 여겨지지 않는 대상에게까지도 생명력을 부여하는 이들을 우리는 성우라 부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부 사람들은 성우를 단순히 ‘목소리가 좋은 사람’ ‘성대모사를 하는 사람’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외국에 비해 한국에선 성우란 직업 자체가 많이 주목받지 못하기도 한다. 『대학신문』에선 성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성우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성우 정재헌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성우를 꿈꿨던 소년의 목소리, 세상에 희망을 전하다

어린 시절의 우연한 경험은 정재헌 성우가 성우를 꿈꾸도록 만들었다. 정 성우는 “성우가 되려고 했던 계기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중학생 때 짝사랑했던 국어 선생님이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제 번호를 부르며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며 “별생각 없이 읽었는데 선생님이 칭찬하며 내게 책 읽기를 전담으로 맡겼다”고 회상했다. 좋아하던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자 책 읽기에 매진하던 동안, 정재헌 성우는 자신이 목소리에 담아낸 느낌에 따라 같은 문장도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 후 정 성우는 텔레비전을 보던 도중 목소리만으로 연기하는 성우란 직업을 알게 됐고 자연스레 그 꿈을 좇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정재헌 성우가 거쳐온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공채 시험에 합격한 후 정 성우가 겪었던 3년간의 전속 시기는 그의 성우 생활 중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본 MBC 성우 공채에 합격했던 정재헌 성우와 달리 그의 동기 중 절반은 타 방송사의 전속 생활을 끝낸 후 다시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정재헌 성우는 “실전 경험을 통해 실력을 쌓아온 동기들에 비해 스스로가 성우로서 덜 완성된 상태라고 생각했다”며 “전속 생활 동안 늘 비교당하고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연출자들과 마주했을 때 정재헌 성우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독하게 연습에 임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따라잡기 위해 투자했던 수많은 노력 덕분에 힘든 전속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원하는 연기가 나오지 않을 때도 그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최선의 연기를 하고자 노력했다. 정재헌 성우는 “오래 전부터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다”며 “어떤 발성이나 호흡을 사용해야 이를 보완할 수 있을지 늘 연구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정재헌 성우는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연기를 통해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지인이나 팬에게 받은 연락은 그에게 큰 직업적 보람을 안겨줬다. 정 성우는 “친한 지인들로부터 애니메이션에서 맡았던 캐릭터 목소리로 자녀들과 통화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고 말했다. 이전엔 말도 듣지 않고 밥도 잘 먹지 않던 아이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긍정적으로 바뀌었던 경험은 정재헌 성우에게도 놀랍고 감사한 경험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에 정재헌 성우가 연기했던 작품을 보며 마음의 위안과 살아갈 힘을 얻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내가 했던 연기를 통해 힘든 시기를 극복한 팬들의 사연을 오프라인 팬 모임에서 여러 차례 들었다”며 “더 많은 진심을 담아 연기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 희망을 전달할 수 있는 성우란 직업은 그에게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람찬 천직이다.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때도 꼭 성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억 속에 흔적을 남긴 캐릭터, 그들에게 닿기까지

정재헌 성우가 더빙한 작품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가 맡았던 캐릭터들은 한 단어로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는 “목소리가 특정한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는 걸 매력적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지금까지 해보고 싶었던 캐릭터는 다 해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통해 정재헌 성우는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두 작품을 소개했다.

성우로서의 자신을 잊고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됐던 작품으로 정 성우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를 선정했다. 주인공 사쿠 역할로 캐스팅이 된 후 처음으로 영화를 본 그는 원작 배우의 감성에 자신의 연기를 더해 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에게 이 영화는 처음 봤을 때부터 연습을 하는 매 순간까지도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그는 연습을 많이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돼 본 녹음에서 깊은 감정을 살리지 못할까봐 걱정할 정도로 열심히 더빙을 준비했고, 본 녹음에서 하이라이트 부분의 대사를 끝낸 후 뒤에 앉아있던 선배 성우들의 눈물을 목격했다. 정재헌 성우는 “그 모습을 보고, 내 연기가 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기뻤다”고 말했다. 녹음이 끝나고 평소 연기 칭찬에 인색했던 선배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받는 등 정 성우에게 이 작품은 강렬하고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애니메이션 <너에게 닿기를>(2009〜2011)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정재헌 성우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그는 “정재헌이란 성우를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작품”이라며 “오디션 과정이 힘들었던 작품이라 더 기억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주연 캐릭터를 선발하는 오디션은 피디가 선정한 세 명 정도의 성우 사이에서 진행되지만, 이 작품은 유일하게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개 오디션이 치러졌다. 정재헌 성우는 “이 작품에 담긴 감성이 너무나도 좋았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해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강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80명의 성우들이 모여 경쟁률이 높았기 때문에 기대감을 낮추고 오디션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막상 주인공 카제하야 쇼타 역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성우 공채에 합격했을 때만큼이나 기뻤다”며 “연기하는 동안 매주 설레는 감정으로 더빙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더 나은 더빙 시장이 되기 위해선

국내 성우계는 외국과 달리 제한적이고 협소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더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더빙된 작품을 어색하고 낯설게 느끼며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재헌 성우는 “어려서부터 더빙으로 된 작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직접 더빙 작품을 접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더빙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깨는 데 기여한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주토피아>(2016)를 꼽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닉 와일드를 맡아 연기했던 정재헌 성우는 “개봉한 지 한 달 뒤에 뒤늦게 입소문을 타며 영화가 흥행하는 과정에서 더빙판에 대한 좋은 평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더빙 시장이 확대되기 위해선 주토피아처럼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더빙 작품이 더 많이 제작돼야 한다”고 밝혔다.

더빙 시장이 겪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구조적인 문제도 개선해야 한다. 정재헌 성우는 “아직까지도 국내 자체 제작 콘텐츠가 적고, 유아용 콘텐츠에 한정돼 있다”며 “국내 더빙 시장이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선 유독 더빙으로 제작되는 콘텐츠에 심의가 까다롭게 적용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제작되고 시장이 운영될 수 있는 체제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다. 이는 외국 콘텐츠에 대한 의존과 국내 성우계의 축소를 초래했다. 정 성우는 “서브컬쳐로서 차별받고 있는 더빙에 대한 편견이 사라져야 한다”며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감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끝으로 정재헌 성우는 한국어 더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리 사회엔 분명 자막만으로 콘텐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정재헌 성우는 “시각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자막 자체를 읽을 수 없거나 이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공중파 방송에선 더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프랑스와 독일 등에선 자국어 더빙이 되지 않은 작품의 상영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정 성우는 “원작과 더빙을 모두 제공하고 개인이 선택해 볼 수 있도록 방영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를 위해선 법적 개선과 같은 국가적 책임도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우란 직업에 대해 매일 매 순간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정재헌 성우는 “앞으론 영화나 실사 외화 시리즈에 대해서도 더빙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얘기했다. 성우란 직업에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며 자신의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이어나가고 있는 정재헌 성우가 개선된 성우 시장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펼칠 그 날을 기대해본다.

 

사진: 박소윤 기자 evepark0044@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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